출판가, 요즘 대세는 오디오북
남자들이 읽기 시작했다… '귀'로
조선일보 김경은 기자 eun@chosun.com
출판가, 요즘 대세는 오디오북
노인·시각장애인용 책이다?
- 3년 새 5000개 넘게 출시… 판매량도 3배↑ 대사 하고, 효과음 넣고… 형태도 다양화돼
여자는 보고 남자는 듣는다?
- 30~40대 男, 오디오북 가장 많이 구입 "귀, 눈보다 덜 피곤… 청각이 뜨는 이유"
'재테크 하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하루 15분 정리의 힘' '5년 후 중국'…. 따끈따끈한 신작 오디오북(audio book)들이다. 오디오북은 말 그대로 귀로 읽는 책. 요즘 독자들은 한 달 전 나온 자기계발·실용서도 오디오북으로 듣는다. 국내 출판계에서 "오디오북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외국에서도 노인만 듣는다더라, 시각 장애자용 상품이다, 이런 평들이 많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콘텐츠의 양이 크게 늘면서 질적인 면에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달라지는 오디오북
30대 회사원 김성찬(31)씨는 아침에 눈뜨면 '명심보감' 오디오북을 튼다. 출퇴근 길, 운전할 땐 '스티브 잡스의 세상을 바꾼 말 한 마디' '공자의 학습법' '회계천재가 된 홍대리' 등을 듣는다. 이번 주에 산 오디오북만 7개. 3년 전 오디오북을 처음 접한 김씨는 "종이책보다 편하고 재밌더라. 뭣보다 한두 시간만 들으면 책 한 권을 다 읽은 효과가 나서 좋다"고 말했다.
- 사진=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예전 오디오북은 성우가 시(詩)나 소설을 글자 그대로 읽은 경우가 대부분. 지루했다. 하지만 요즘 오디오북은 단순 낭독형은 물론, 2시간 이하 분량으로 요약해 드라마처럼 꾸민 경우도 있다. 콘텐츠가 다채로운 건 물론이고, 물소리·바람소리 등 효과음을 가미해 생동감을 살렸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오디오북 판매량은 '2009년 3891개→2010년 1만959개→작년 1만3242개→올 상반기(지난달 31일까지) 5768개'로 3년 새 3배가량 늘었다. 내용 면에서도 풍요롭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노무현의 서재' '공자처럼 학습하라' 등 신간이 오디오북으로도 발 빠르게 나왔다. 지난달 말에는 헤밍웨이 사후 50주년을 맞아 배우 이보영이 육성 녹음한 3시간 분량의 '노인과 바다'가 출시됐고, 2009년 이후 출시된 오디오북(이하 예스24 기준)만 최소 5000개가 넘는다.
◇남자가 더 많이 산다
책은 보통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산다(4대 6). 오디오북은 반대로 남자가 더 산다. 성별로 보면 52.6%(남자) 대 47.4%(여자)이다. 하지만 세대별로 좀 더 굵게 잘라서 보면, 남녀 모두 '60대 이상→10대 미만→50대→20대→40대→30대' 순으로 오디오북 구매 숫자가 늘어나 30~40대(69.3%)가 20대 이하·50대 이상(30.7%)보다 오디오북을 더 읽는 현상이 뚜렷했다.
분야별 판매개수는 두루 읽는 문학이 가장 많았고, 자기계발, 경제, 실용 순이었다. 요컨대 진득하게 앉아서 책에 집중할 여유가 없지만 자기계발 욕구는 강한 30~40대 직장인이 자투리 시간을 아껴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을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큰 출판시장인 미국에서 오디오북 시장은 전체의 12%를 차지한다. 그만큼 역사가 길고 구매력도 세다. 그래미상에 오디오북 경쟁부문이 있을 정도. 이러한 추세는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해석은 두 가지.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종이책 읽기는 촉각의 대명사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발달로 손끝 감촉으로 느끼던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촉각은 지고 청각은 뜨는 세상이 되어서 최소한 디지털 노마드(최첨단 정보통신기기를 가지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21세기형 신인류)에게 테이프·CD에서 MP3·스마트폰으로 확장된 오디오북 형태는 독서의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종이보다 MP3에 더 익숙해 책을 '듣는' 건 음악감상과 비슷한 즐거움을 준다는 것.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과)는 "사람은 편한 걸 귀신같이 찾아낸다. '책은 읽어야 제맛이지' 하던 사람도 깜깜한 데서 움직이며 듣는 데 익숙해지면 금세 패턴을 바꾼다"고 했다. 시각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도 내놨다. "눈은 보려고 집중할 때 에너지를 씁니다. 잠자면서 배터리를 충전하고요. 하지만 청각은 워밍업이 필요 없어요. 귀로 듣는 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덜 피곤합니다."
◇'듣기'가 주는 매력
사실 12~13세기 이전 독서는 소리 내서 읽는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시와 노래는 입으로 전해졌다. 1605년 출간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밤에 주막으로 몰려든 일꾼들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낭독해 주는 소설에 귀를 기울이며 활력을 되찾는다. 조선 후기 저잣거리에서 책을 읽어주던 전기수(傳奇叟·직업 낭독가)가 책을 너무 실감나게 읽는 바람에 흥분한 사람이 악인 목소리를 내던 전기수를 칼로 찔러버렸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김원경(41)씨는 밤마다 아이와 나란히 누워 함께 오디오북을 듣는다. '어린 왕자'와 '위대한 개츠비'를 들었고, 지금은 '햄릿'을 듣고 있다. 김씨는 "말에는 리듬이 있어서 계속 들으면 잔잔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며 "아이에게 종이책을 주고 알아서 읽으라고 했다면 몰랐을 세상도 발견했다"고 말했다. "저는 무심코 넘기는 부분에서 아이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혹은 그 반대일 때가 있거든요."
레몽 장의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에서 주인공 마리―콩스탕스는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과 같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따스함과는 바꿀 수 없죠."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가 소리내어 읽는 장치를 통과해 타인과 공유될 때 독서는 동시적 매력을, 낭독은 현재적 아름다움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