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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골과 진골 -그들의 집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8. 10. 19. 21:22

신라 골품제 기억하시죠? 성골과 진골이 사는 집 구조가 달랐다고 하는군요. 잘 소개된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신라의 성골과 진골 -그들의 집   

 

http://blog.chosun.com/skinpass/3429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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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을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한 王朝가 500년 이상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그러나 신라는1000년, 백제와 고구려는 말 할 것도 없고 고려나 朝鮮 왕조도

500살을 넘겼다.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사실이고 우리는 긍지를 가져도 좋다고 생각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새긴다면,


半島라는 지형적인 특성 그리고 통일된 단일종교, 문화로서 불교, 세월이 흐르면

하기 쉬운 세상을 지켜주는 정신문화로서의 종교적 역할과 支柱,  물론 조선조는

 유학과 성리학 등 고급스런 정신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막강한 왕권 국가에서도 군주는 백성의 삶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도덕적인 청

렴도3국으로 구성되어 그것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가교 역할 때문이 아

닐까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신라는 진골과 성골이라는 계급제도와 화백제도가 있어서 사회를 통

하고 리드하는 엘리트 계층을 육성하고 下部로는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한 높은

 정치적 수준의 통치력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시다 시피 신라는 부모 양쪽이 왕족인 후손을 부르는 성골(聖骨)이라는 최고의

족 계급과 한쪽이 왕족인 진골(眞骨)이라는 2nd 계급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

로서 역할을 잘 한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29대 태종무열왕(AD604~661년) 부터

는 진골 출신이 왕권을 계승한다.


이런 특수한 골품 제도 때문에 역사상 일찍 女王이 등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 골품

도 때문에 신라는 근친혼과 화랑세기나 유물에서 보듯이 상당히 자유로운 성문

화가 유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과 남녀 有別을 주요시 하는 유교와 불교가 융성 함에도 Free Sex의

가 있었다는 점과 그러면서 부패하지 않는 사회상에 대해서는 해석하기가

난감하다.(삼국은 불교 중심 국가이면서도 유교도 융성 하였다 한다.)


보문단지에 가면 신라의 진골과 성골의 저택을 고증 하에 세워놓아서 당대의 문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에는 온돌 문화가 일찍이 고조선부터 시작하여 북방계인 고구려도 이용하

지만, 신라는 숯을 사용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立式 문화가 주류가 아니었

생각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眞骨은 집의 크기가 제한 받고(가로 세로 24자 이내), 겹처마를 할 수

 없고 , 담장에 서까래 있는 지붕도 사용 못 하였고 회칠도 없다. 반면에 聖骨은

겹처마 뿐만 아니라 막새기와 사용 및 공포와 집안에 회랑도 설치하고 단청만 하

면 王宮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또 진골은 침실에 병풍에 수를 놓을 수도 없다.


다음은 성골과 진골의 가옥 형태를 비교한 것이다.

좌측 사진이 진골, 우측이 성골계급의 집 구조이다.(200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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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겹처마와 우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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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의 모습, 성골인 우측이 좀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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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 우측인 성골은 중앙에 화로가 있고 좌우에 화려한 주거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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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칠과 담장 지붕에도 서까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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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실 뒷쪽인데, 회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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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겹처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