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西에서 東으로… 글로벌 권력이동 가속도”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10. 3. 1. 14:57

 

      “西에서 東으로… 글로벌 권력이동 가속도”
다보스포럼 참석자들 공감 “G20이 G8 대체”
1월 29일 밤 8시. 스위스 다보스의 더비호텔. 제40회 다보스포럼 세션이 열리고 있었다. 세션 제목은 ‘공익 서비스:최고 인재를 끌어모으기’였고, 기조 연설은 세계경제포럼(WEF)의 차세대 지도자 출신인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이 맡았다. 이밖에도 데이비드 엘우드 하버드 행정대학원장과 스콧 브라이슨 영국 하원의원 등 글로벌 지도자들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했다. 국내에서는 영국계 스코틀랜드 로열은행(RBS) 이지현 고문이 패널리스트로 나섰다.

만찬과 함께 진행된 이날 세션은 WEF가 ‘키우는’ 차세대 지도자들을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만찬에는 노르웨이 하콘 왕세자, 각국의 차세대 지도자 출신 장관, 국회의원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지현 고문은 기자에게 “WEF는 지난 2005년부터 해마다 세계 각국의 젊은 차세대 지도자급 인사들을 엄선, ‘젊은 글로벌 리더들(Young Global Leaders·YGL)’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한 뒤, “차세대 젊은 지도자를 선정해 다양한 국제 감각을 익히게 하고, 세계적 이슈에 눈뜨게 하는 WEF의 야심찬 사업”이라고 밝혔다.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도 WEF가 선정한 차세대 지도자 프로그램 출신이다.

이날 세션은 제목 그대로 사회 공익을 위한 리더십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인재를 어떻게 발굴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칼데론 대통령은 만찬 내내 경청한 뒤 공익 근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조 연설을 했다.

▲ 스위스 다보스에 모인 각국 정상들. (왼쪽부터)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 이명박 대통령,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 / photo 조선일보
안보·문화 분야도 G20이 대세
이날 세션에 참석한 젊은 글로벌 리더들의 최대 관심 사항은 미래, 즉 향후 글로벌 권력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느냐였다. 두 가지 전망은 G20(주요 20개국)이 G8(주요 8개국)을 대체하고, 금융위기 이전 글로벌 정치·경제·문화 권력이 서방국가들 중심에서 아시아 및 신흥 개발도상국으로 급격히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칼데론 대통령은 기자와 만나 “세계의 중심축이 상당 부분 한국과 중국, 멕시코, 브라질 등 신흥 경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면서 “경제나 기후변화뿐 아니라 안보·문화 등 분야까지 G20이 역할을 확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1월 27일 개막연설에서 “금융개혁 문제를 개별 국가 차원이 아니라 G20에서 함께 논의해야 한다”면서 “G20은 21세기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의 전조”라고 말했다.

일부선 중국·인도 ‘능력’에 의문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1월 29일 “이제는 G20 시대라는 점이 분명해졌다”면서 “다보스포럼이 과거에는 서방 선진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주요 8개국(G8)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이제는 달라졌다”고 보도했다. 중국과 인도가 다보스포럼에 최대 규모의 대표단을 파견하는 국가로 떠올랐고, 다보스포럼조차 이들 주요 개발도상국을 빼놓고는 아무런 논의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글로벌 권력의 대이동을 예상한 발언도 많았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신흥경제국들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 회복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서 “세계경제의 성장 엔진이 주로 신흥경제국에 있다”고 말했다. YGL 출신인 이스라엘의 에프라트 펠레드 아리슨 투자회사 회장은 “돈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면 글로벌 권력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서 “지금은 중국·인도 등 신흥경제국이 대세”라고 말했다.

벨기에의 필립 왕세자는 1월 28일 다보스 슈와츠코프호텔에서 열린 ‘한국의 밤’의 행사에 참석, 국립발레단의 무용과 한국 팝 음악 등을 지켜본 뒤, “한국 문화에 깜짝 놀랐다”고 격찬했다. 영국 BBC 방송은 올 1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경제 위기를 계기로 권력의 중심이 동양으로 이전되고 있다는 응답이 60%에 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권력이동이 가속도가 붙는 추세지만, 국민소득 3000~ 4000달러도 안되는 중국과 인도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많았다. 미 투자회사인 블랙스톤 그룹 스티븐 슈워츠만 회장은 “중국이 왜 이기적으로 행동하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지만, 서양인 대부분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00위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권력 이동에 따른 정치적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케네스 로스 휴먼라이츠워치(HRW) 사무총장은 “모두들 중국과 인도의 부상에 대해 경이롭게 생각하지만, 글로벌 권력이동이 초래할 정치적 결과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면서 “중국이 경제발전과 동시에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리뤄구(李若谷) 수출입은행장도 “중국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데 솔직히 우리도 부담스럽다”면서 “역사적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인 나라가 세계의 지도국으로 부상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의 YGL 출신으로는 김미형 금호그룹 수석고문변호사,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윤석민 SBS 부회장, 김주영 전 좋은기업지배구조 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김연희 베인앤컴퍼니 파트너, 윤송이 엔씨소프트 부사장, 김주하 MBC 앵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김진 변호사, 이재웅 다음 창업주,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이병남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대표 등이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녹색기술 개발해 개도국과 공유하겠다”

다보스 놀라게 한 ‘MB의 아이디어’

제40회 다보스포럼 기간 중 세계경제포럼(WEF)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한 마디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 대통령은 WEF측에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녹색기술을 개발해 개도국과 공유하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이 아이디어는 당초 코펜하겐 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내놓았던 녹색 관련 구상 중 하나였는데, 슈밥 회장이 WEF 차원에서 발전시켜야 한다며 다보스포럼의 정식 세션에 반영토록 지시한 것이다. WEF의 한 관계자는 “슈밥 회장이 한국 정부의 아이디어를 받아 몇 개국과 함께 진짜로 추진할 것 같다”고 귀띔해줬다.

실제로 WEF는 지난달 29일 ‘IdeasLab for Global Redesign Initiative(세계 재디자인 이니셔티브)’ 세션에 연세대학교 문정인 교수를 패널리스트로 내세워 이 대통령의 아이디어인 ‘녹색 책임 성장 모델’을 소개했다. 패널리스트 4명 중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문 교수는 40여명의 참석자들에게 “이 아이디어는 첫째 한국이 세계적인 녹색성장 연구소(Global Green Growth Institute)를 설립, 기업과 함께 기술을 개발하는 허브가 되고, 둘째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제공국이 된 한국이 개도국과 선진국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서 개도국에 기술을 제공하며, 셋째 한국이 먼저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접근방식을 택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세션은 각 패널리스트가 소개한 내용에 대해 참석자들이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완한 뒤, 참석자 대표가 이 내용을  패널리스트 대신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기자도 본의 아니게 ‘녹색 책임 성장 모델’ 팀에 들어가 내용을 보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발표는 그레고리 디스(Dees) 듀크대학 경영학과 교수가 했다.

이 모델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됐다. 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개도국에 넘겨줄 경우 어떤 형태로든 보상체계(incentive)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아무런 이윤 없이 기술을 개발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 기술을 제공하는 한국이나 기술을 받는 국가의 정권이 바뀌어도 ‘녹색 책임 성장 모델’이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점이다. 즉 정치적 리스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지속성장이 가능(sustainability)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즉석 발표자로 나선 디스 교수는 “개도국이 필요한 것은 생선이 아니라 생선을 얻을 수 있는 노하우”라면서 “난마처럼 얽힌 기후변화 이슈에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격찬했다.

이 세션의 사회를 맡았던 옥스퍼드대학교 리처드 파스칼 교수는 “WEF의 설립취지가 남을 돕는 것인데,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이 개도국의 입장을 반영, 녹색기술을 공유한다면 이는 말을 실천으로 옮긴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WEF가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발전시켜 이슈화할지 주목된다.


 / 다보스 = 최우석 조선일보 산업부 기자 wscho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