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잡기

눈물로 쓴 대학노트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7. 10. 12. 20:44

눈물로 쓴 대학노트’ 모교 가다

47년前 학비 벌려고 외판사원 일하며 향학열 불태우던…
양복점 경영 70세 이철하씨, 성균관대에 기증
“힘들었지만 공부 행복… 후배들에 귀감 되길”

글·사진=류정 기자 well@chosun.com  
입력 : 2007.10.12 00:12

 

지난 6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누렇게 빛 바랜 노트 뭉치 한 권이 도착했다. 16절지 크기의 여러 공책 낱장을 이어 붙인 제본의 두께는 25㎝, 모두 2000페이지가 넘었다. 페이지 사이사이에는 ‘國際金融論(국제금융론)’ ‘財政政策(재정정책)’ 등이 적힌 40장의 색인(索引)도 붙어 있다.

제본을 펼치자 ‘韓國經濟論 檀紀 4296年 經濟科 4年, Lee chul ha’(한국경제론 단기 4296년 경제과 4년, 이철하)라고 적힌 첫 장과 함께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한 대학생이 수업을 들으며 기록했던 강의 내용이 빼곡히 드러났다.

  • ▲ 47년된 대학 노트를 성균관대 후배들에게 기증한 이철하(70)씨가 자신이 운영하는‘킴스양복점’에서 포즈를 취했다.

노트를 보낸 주인공은 서울 소공동에서 ‘킴스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철하(70)씨. 40여 년 전 성균관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양복점 외판사원으로 일하며 공부했던 추억이 서린 노트를 모교 경제학과 60주년을 맞아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60학번인 이씨는 “어려웠던 시절,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씨가 대학 필기노트를 애지중지 아껴 온 사연은 이랬다. 보릿고개를 여러 번 넘었던 1960년대 초,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양복점 외판사원으로 일해야 했다. 아침 일찍 양복점으로 출근해 가게를 청소하고 광고지를 돌리고 수금을 하러 돌아다녔다. 강의는 그 사이에 ‘요령껏’ 들어야 했다. 이중생활을 직장에 들키지 않기 위해 생각한 방법이 바로 낱장 필기. 16절지 몇 장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집에서 교과서를 보며 다시 정리하는 일을 반복했다. 교과서는 출근 전 양복점 뒷골목에 있는 다방에 맡기고, 필요할 때마다 들고 다녔다. ‘땡땡이’는 사치였다. 놓친 수업 필기는 친구 노트를 빌려 채웠다.

이씨는 “열심히는 했지만 성적은 시들시들(C나 D 학점이 대부분)했다”며 쑥스러워했다. 이씨는 대학 졸업 후에도 양복점 직원으로 일하다 1971년 직원 10여 명을 거느린 양복점 사장이 돼 지금까지 36년간 ‘양복점 사장님’으로 살고 있다. 이씨는 “자식들한테 지금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아비라도, 과거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노트를 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이씨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의 성실함을 본받아 남부럽지 않게 컸다. 아들 은준(40)씨는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딸 은영(36)씨는 제일모직 미국 지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씨는 후배들도 노트를 보고 세 가지를 느꼈으면 한다고 했다. “공부할 땐 시기를 놓치지 말라. 적성에 맞다면 한 우물을 파라.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꼼꼼히 기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