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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역사로 본 쥐띠해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8. 1. 8. 16:12
[신년특집] 역사로 본 쥐띠해
20세기의 첫 쥐띠해인 1900년, 만국박람회와 올림픽을 개최하고 세계 네 번째로 지하철을 개통해 이른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를 구가하며 20세기 벽두를 가장 요란하게 장식한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피카소가 첫 개인전을 연 것도, 훗날 오르세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오르세역이 건축된 것도 역시 그 해의 파리였다.

▲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한국관 모습)
1900서울 종로에 첫 전깃불… 피카소 첫 개인전

파리 밖에서는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 발표로 현대물리학의 혁명이 시작되었고, 엔리코 카루소는 밀라노 스칼라좌 데뷔에 성공해 20세기 최고 성악가로 우뚝 설 날을 꿈꿨다. 칼 란트슈타이너가 혈액 속에 다른 사람의 혈액을 응집시키는 알파와 베타 두 가지 응집소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1900년이었다. 중국에서는 의화단사건으로 청조의 몰락이 가속화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처음 운전을 시작한 전차를 통해 서구의 과학기술을 좇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세기’란 개념이 없어 1900년 1월 1일을 그냥 ‘경자년 무인월 갑술일’로 부른 한국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4월 10일 서울 종로의 가로등에 민간 최초로 전깃불이 들어왔으며, 7월 5일엔 한강에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근대적 한강철교가 세워졌다.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구조 장면)
1912청조(淸朝) 몰락… 타이타닉호 침몰

1912년 2월, 여섯 살의 푸이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268년 동안 이어온 청조(淸朝)가 문을 닫았다. 진 시황제 이래 2200여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오던 중국의 왕조사가 하루 아침에 몰락한 것이다. 4월엔 세계 최대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 해저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1500여명의 목숨까지 수장시켰다. ‘발레의 전설’ 소련의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자신의 첫 안무작품 ‘목신(牧神)의 오후’를 파리 무대에 올려 대호평을 받은 것도 1912년이었다. ‘중력의 법칙’을 비웃는 듯한 도약을 특징으로 하는 니진스키의 등장은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분기점이었다.

▲ 1924년 레닌 사망(레닌의 연설 모습)
1924레닌 사망… 인공향수 ‘샤넬 No.5’첫선

1924년 5월, 최초의 인공향수 ‘샤넬 No.5’가 첫선을 보였다. 샤넬의 본업은 패션디자이너였다. 단순하면서 실용적이고, 편안하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는 샤넬의 패션 철학에 따라 여성의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은 사라지고 재킷과 핸드백에는 주머니와 어깨 끈이 달렸다. 샤넬이 20세기 여성에게 선물한 것은 ‘패션’이 아니라 ‘자유’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착근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이 눈을 감은 것도 1924년 1월이었다. 스탈린이 후계 싸움의 최후 승자가 되면서 숙청과 살육의 날이 머지않았다.

미국에서는 에드거 후버가 FBI의 전신인 법무부 수사국장에 취임(1924년 5월), 오랫동안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후버가 48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을 보필하며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비밀파일에 있었다. 파일은 후버의 안전을 보증하는 면죄부였다.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약점을 꿰뚫고 있는 후버의 파일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버의 비밀파일을 이용해 정적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10월엔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중대선언을 했다. 심미적 선입관이나 기성의 표현 기술을 떠나 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표현 행위를 강조하는 ‘초현실주의 선언’이었다. 맹위를 떨치던 다다이즘이 모태였으나 다다이즘을 부정한 뒤에는 유럽 예술계를 평정, 막강한 문화권력이 되었다.

▲ 1936년 베를린올림픽(손기정 선수 역주 장면)
‘1936피의 해’… 중국 서안사변, 스페인선 프랑코의 쿠데타

1936년 8월엔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세계에 과시할 목적으로 베를린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스타디움과 아우토반 등의 대공사로 실업자가 줄어들면서 경제는 불황의 터널을 벗어났고, 히틀러에 대한 지지도 높아졌다. 올림픽을 계기로 히틀러의 지위가 더욱 단단해졌다는 점에서 베를린올림픽은 인류의 대재앙을 부른 또 하나의 죽음의 전주곡이었다.

12월엔 중국의 운명과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오쩌둥의 홍군은 1년간의 장정(長征) 끝에 거의 궤멸된 상태로 연안에 도착(1935년 10월),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이 기세등등하게 중국 땅을 잠식해 들어와도 홍군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장쭤린)가 일본군에게 폭사 당하고, 아버지의 만주 땅마저 일본군에게 빼앗겨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장쉐량으로서는 이런 장제스가 달가울 리 없었다. 장쉐량은 토공전(討共戰) 독려를 위해 서안을 찾은 장제스를 감금한 뒤, 내전 중단과 항일투쟁 약속을 받아냈다. 서안사변은 제2차 국공합작으로 이어졌고 마오쩌둥은 시간적·공간적 여유를 가진 덕에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같은 해 스페인에서도 피의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1936년의 2월 총선을 통해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세력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정권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왕당파와 군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문제는 양측의 힘이 팽팽한 데 있었다. 군부 실력자 프랑코의 쿠데타로 내전이 일어났으나 독일·이탈리아·소련 등까지 가세하면서 ‘2차 대전의 리허설’로 비화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4만여명의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국제여단’을 편성하긴 했어도 ‘뜨거운 가슴’만으로는 정규군으로 구성된 프랑코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수십만 명이 죽고서야 스페인은 프랑코 수중으로 떨어졌고 36년 독재의 질곡에 빠져들었다.

▲ 1948년 첫 국무회의(이승만 대통령 취임 후 첫 회의)
1948대한민국 첫 총선…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1948년은 2008년과 간지가 같은 무자(戊子)년이다. 5월 10일 대한민국 첫 총선이 치러졌다. 좌익의 폭동과 소요로 불상사가 적지 않았으나 가던 길을 멈출 수 없었다. 5월 31일의 제헌의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고, 7월 1일에는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으며 7월 17일에는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되었다. 7월 20일 이승만 국회의장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같은 해 5월, 1900년 전 로마군에 의해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며 감격에 젖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에게는 분노였고 배신이었다. 독립을 선포한 그날 밤, 아랍제국이 신생국 이스라엘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1차 중동전이 막을 연 것이다. 1948년 6월 24일, 소련이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모든 육로·수로·철로를 가로막고 식량 수송까지 금지함으로써 독일의 베를린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소련의 초강수에 미국은 생필품을 서베를린까지 비행기로 공수하는 맞불작전으로 ‘베를린 봉쇄’에 맞섰다. 1949년 5월 봉쇄가 해제되긴 했으나 동서냉전은 더욱 깊어졌고 동·서독 분단은 기정사실로 바뀌었다.

▲ 1960년 4·19의거(경무대로 진입 시도하는 군중)
1960‘4월 혁명’… 미국서 경구피임약 시판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 시위, 4·18 고대생 피습사건 등을 거쳐 4월 19일에 절정을 이뤘던 ‘4월 혁명’은 4월 26일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까지 하야시키면서 제1공화국을 붕괴시켰다. 차기 정권은 민주당의 몫이었다. 장면 내각이 출범했으나 민주당 신·구파 간 끊이지 않는 갈등과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각종 집단의 요구들로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쿠데타가 비집고 들어갔고, 결국 2공화국은 수립 9개월여 만에 종막을 고했다.
5월 9일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산아제한용 경구(經口) 피임약 ‘에노비드 10’을 정식으로 승인, 인류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여성들은 임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여성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1960년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2년10개월 만에 비명에 갔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넘긴 것 말고 딱히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었으나 미국인들은 케네디를 무엇을 이룬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꿈과 희망을 심어준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합의 장면)
1972미·중 화해… 한반도에도 훈풍 ‘7·4 남북공동성명’
 
1972년 미국과 중국이 오랜 대립을 끝내고 손을 잡았다. 그 전에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 소련과의 진보도 충돌(1969년) 후 소련을 견제할 새로운 카드가 필요했던 중국의 계산이 맞아떨어지면서 물밑 대화가 분주했다. 주역은 완벽한 잠행극으로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였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베이징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딘 순간 중국은 ‘죽의 장막’을 걷어젖혔다.  

그 해에 한반도에도 데탕트(긴장완화) 바람이 불었다. 1972년 5월에 평양을 극비 방문한 이후락 중정 부장이 김일성을 만나면서 급물살을 탔다. 뒤이어 남북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고, 곧 통일이 될 것처럼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양측의 속셈이 달라 1년 만에 공염불이 되었다.

1972년은 남북한 양쪽에서 1인 지배체제가 확고하게 뿌리내린 해였다. 12월 27과 28일, 남한의 ‘유신(維新)’과 북한의 ‘유일(唯一)’이 연이어 태어났다. 남한에서는 유신헌법 공포와 함께 제4공화국이 출범했고, 북한에서는 주석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통해 장기집권을 꾀했고, 김일성은 유일체제 완성으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를 본격화했다. 역사를 봉건왕조시대로 되돌린 북한의 ‘유일’과 달리 ‘유신’은 양면성이 있었다. ‘유신시대’는 분명 탄압과 인권유린의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때만큼 강한 추진력과 역동성을 가진 ‘발전의 시대’도 없었다. ‘한강의 기적’은 유신의 또 다른 산물이었다.

▲ 1984년 마돈나 등장
1984‘섹스 심벌’마돈나 등장, 노출시대 열어

1984년 9월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 시상식에서 마돈나가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미발표곡 ‘Like a Virgin(처녀처럼)’을 노래했다. 성적 매력을 여지없이 발산시키는 마돈나를 향해  ‘팝음악계의 창녀’ ‘섹스의 화신’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마돈나는 더욱 대담한 노출 전략을 구사하며 ‘마돈나 시대’를 개척해나갔다.

▲ 1996년 CDMA 서비스 시작
(CDMA 방식의 PCS 단말기 )
1996한국 세계 첫 CDMA서비스… 애니콜 신화 출발

1996년 1월 1일,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이동 중에 통화가 끊기거나 혼선되는 현상은 없었다. 세계 최초로 CDMA 상용서비스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 수출사를 새롭게 쓴 ‘애니콜 신화’도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9월, CDMA 방식의 PCS 단말기 170만대(6억달러 규모)를 미국에 3년간 수출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이 아닌 엄연한 브랜드 수출이었다. 이후 애니콜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갖고 싶어하는 휴대폰이 되었다.


/ 김정형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