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잡기

'영어는 운영체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까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8. 1. 25. 18:36

'영어는 운영체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까


[[오마이뉴스 민경진 기자]

동남아 여행 중에 혹시 서점에 들러보셨습니까? 공항이나 시내 어디서도 쉽게 서점을 찾기 힘들지만 막상 가 보아도 영어책 천지입니다. 현지어로 된 책은 많지 않습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대학교재 등 고급정보와 지식은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 영어로 돼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영자신문 역시 어지간한 현지어 신문보다 독자수가 많고 영향력 또한 높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영자신문들은 수십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학생들의 영어교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요? 왕성한 출판시장을 자랑하고 신문 독자수도 엄청납니다. 양대 일간지인 <아사히>와 <요미우리>는 7백만에서 1천만 부수를 자랑합니다.

일본 지식사회의 또 하나 특징은 막강한 통·번역 인프라입니다. 동시통역과 실시간에 육박하는 번역출판에 익숙한 일본인이 영어실력이 뒤떨어지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인은 심지어 영어가 기본인 국제회의에 가서도 왜 일본어 동시통역을 제공하지 않느냐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워낙 일본 내에서 통·번역 서비스를 받는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국제 모임에서 상당수 일본인이 '꿔다 논 보릿자루' 취급을 받는 이유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전 세계에서 영어 못 하기로 이름난 사람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도로 발달한 자국어 출판 인프라와 언론환경이 영어학습을 가로막는 주범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영·미권의 최신 서적은 불과 몇 달 내에 번역되어 소개됩니다. 이러니 아무래도 영어서적이나 영·미권 웹사이트를 봐야 할 시급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동남아나 인도의 경우 고급정보와 지식은 거의 영어로만 존재하기에 상위 10% 인구의 영어실력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을 두고 사이버 공간이 찬·반 양론으로 뜨겁습니다. 기자는 이명박 식의 영어교육에는 반대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영어 조기교육에는 적극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아무리 통·번역 인프라가 막강하다 해도 영어를 직접 구사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교류하는 사람과 경쟁할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고, 듣는 능력은 지구촌 시대의 지성인에게 필수적인 덕목이 됐습니다.

예컨대 똑같은 기사를 써도 네이버 한글검색만 하는 기자와 구글 영어검색까지 활용하는 기자의 기사의 질과 깊이는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후자가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한 때 전 세계 웹 사이트의 90% 가량이 영어 텍스트인 적이 있었고 지금도 고급정보의 태반은 압도적으로 영어로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영어가 원전이 아닌 책이 번역될 때도 대부분 가장 먼저 영어로(만) 번역된다는 것입니다. 눈덩이 효과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비영어권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오히려 영어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의 학자가 서울에 모여 국제회의를 하는데 예산부족으로 통역을 쓸 수 없다면 어떤 언어를 써야 할까요? 십중팔구 영어일 것입니다. 영어를 이제 더 이상 '앵글로색슨 패권주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한국경제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와 지식경제로 진화할수록, 특히 글로벌 경제에 편입될 수록 영어는 일부 '게이트키퍼'의 주특기가 아닌 온 국민의 필수교양으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에 "인도의 열악한 인프라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특집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사실이기는 한데 저는 다른 면을 보고 싶습니다. 인프라에 대한 불평이 나올 만큼 지금 인도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바로 인도가 가진 또 하나의 훌륭한 인프라, 즉 영어 구사 인구 때문이라고.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인도의 경제발전은 반 이상이 영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인프라를 따라가지 못 하는 인도의 물리적 인프라가 인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 합니다.

한국은 거꾸로입니다. 인천공항, 고속철도, 고속도로 등 물리적 인프라는 국제적 수준인데 영어 인프라가 따라주지 못해 문제입니다. 한국이 인도 정도의 영어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어에는 한 맺힌 독자들이 많고 복잡한 심사를 느낄 수도 있지만 마치 '컴퓨터 운영체제'처럼 여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애플의 맥킨토시 컴퓨터가 뛰어난 디자인과 성능에도 여전히 국내서 홀대 받는 것은 맥킨토시의 운영체제가 '네트워크 효과' 면에서 MS의 윈도에 월등하게 뒤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맥킨토시를 선택한 순간 감수해야 할 불편이 너무나 크기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윈도를 쓰는 것입니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처럼 영어담론으로 나라가 시끄러운 곳이 드물지만 너무 감정을 싣지 말고 영어 역시 담담하게 운영체제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미 영어라는 '운영체제'로 천하통일된 지 오래입니다.

달리 생각할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10년 전에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