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돈키호테'를 읽고 '햄릿'을 떠올렸을까
세계문학의 천재들
해럴드 블룸 지음|손태수 옮김|들녘|928쪽|4만3000원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입력시간 : 2008.02.01 23:18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 1616)와 스페인 소설가 세르반테스(1547~1616)는 각기 다른 날 태어나 다른 장르에서 활동했지만, 세상을 뜬 날은 같았다. 섬과 대륙에 각각 살고 있던 두 사람은 1616년 4월23일 나란히 사망했다. 현대 영국 소설가 앤서니 버제스는 말년에 쓴 소설 '바야돌리드에서의 만남'에서 두 문호가 한자리에 만나는 상상의 풍경을 형상화했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가 이끄는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고 빈정댄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과 '헨리 4세'의 주인공 '폴스타프'는 자신의 작품에서 훔쳐간 인물들이라고 화를 낸다. "당신이 내게서 저 뚱뚱한 남자와 마른 남자를 훔쳐갔잖소?" 셰익스피어는 즉석에서 반박한다. "아니오. 당신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 훨씬 전부터 저들은 런던 극장에서 일하고 있었소." 셰익스피어는 오히려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빌린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햄릿과 폴스타프를 결합해 돈키호테라는 인물을 만들고 나서, 폴스타프의 속된 측면을 산초 판사를 통해 드러낸 것은 아닐까?"
사실은 이렇다. 세르반테스는 평생 셰익스피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말년에 세르반테스의 존재를 알았다. 셰익스피어는 사망하기 5년 전에서야 영어로 번역된 '돈키호테'를 처음 읽었지만, 그의 동료 작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1533~1592)의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의 독서목록에는 몽테뉴의 '수상록'이 들어 있었다. '수필(essay)'이란 말을 처음 쓴 몽테뉴는 희극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성격의 인물을 만드는데 천재였다. 셰익스피어는 몽테뉴의 이미지로 '햄릿'의 장난기 어린 모습을 창조했다.
- 왼쪽부터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그렇다면 세르반테스와 몽테뉴가 셰익스피어보다 한 수 위일까? 현재 미국 문학비평계의 거목인 해럴드 블룸은 이 책을 통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이 언어의 거장들조차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현실을 재연하는 셰익스피어의 능력에 비하면 영원히 적수가 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 속에 있는 의식은 너무나 방대하여 세르반테스, 몽테뉴, 프로이트, 혹은 비트겐슈타인 등 수많은 천재들 속에서도 그의 맞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블룸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언어를 다루는 천재성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세속의 신성(神聖)"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2만1000개의 단어를 사용했다. 3대 고전극작가로 평가되는 라신은 2000개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는 12개 단어 당 하나 꼴로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그는 1800개에 달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그 중 상당수가 현대 영어에 남았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걸출한 두 인물을 창조했다면, 셰익스피어는 이에 필적할 만한 햄릿, 폴스타프, 리어, 이아고, 클레오파트라, 로잘린드, 멕베스 같은 인물을 수백 명이나 만들어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문학사에 영원히 기록될 100명의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단순히 인물들의 독립적 평전을 그러모은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세기의 천재들을 탐구한다. 천재란 언제나 이전의 천재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형성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천재 100명을 분류하는 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그는 유대교 신비주의 철학인 '카발라(Kabbalah)'의 '세피라(Sefirah·카발라에서 말하는 10가지 유출물)'에 따라 천재들을 10명씩 나눠 10장으로 분류한다. 셰익스피어·세르반테스·몽테뉴·밀턴·톨스토이 등은 '왕관'을 뜻하는 '케테르(Keter)' 항목에 분속된다. 이들은 "문학의 왕관이면서 원초적인 무(無)"라고 할만한 천재들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뜻하는 '티페렛(Tiferet)' 장에는 빅토르 위고·보들레르·랭보·발레리 등이 등장하고, '사유능력'이란 뜻의 '비나(Binah)' 장에는 니체·키에르케고르·카프카·프루스트·베케트 등을 다룬다. 각 장에서 다루는 10명의 천재들은 다시 '광채(光彩)'라는 이름의 절로 다섯 명씩 나눠져 있다. 에머슨이 "나는 광채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한 것처럼 천재들은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개의 '세피라'와 20개의 '광채' 속에서 100명의 천재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선택한 천재 100명은 대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작가들이지만, 루이지 피란델로·에우제니오 몬탈레·이사크 바벨처럼 생소한 인물들도 여럿 포함됐다. 저자는 "반드시 포함시킬 인물들을 제외하면 내 선택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세피라'에 속한 작가라 하더라도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토마스 만 등과 함께 지혜를 뜻하는 '호크마(Hokmah)' 장에 속한 괴테는 독일어로 번역된 '햄릿'을 읽고 늘 괴로워했다. 괴테는 '파우스트 2부'에서 '햄릿'을 자주 패러디(모방)했다. '왕국'을 뜻하는 '말쿠트(Malkhut)'에 속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또한 '햄릿'의 뒤를 이은 작품이다.
천재들의 언어를 '천재적' 방식으로 서술한 저자의 책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작가의 작품세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900쪽 넘는 책을 읽다가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도 여러 번 든다.
"파우스트는 사실 햄릿과 나란히 놓고 보면 좀비에 불과하다" "카프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지루하고, 그의 작품 '성'은 영적 탐구의 로맨스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같은 오만하고 냉혹한 비평은 때로 독선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천재들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일깨울 한줄기 빛을 발견하려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포기할 독자들을 예견한 듯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천재의 글이란 우리가 지혜에 도달하는 가장 탁월한 길이며, 또한 그것이 문학의 진정한 효용성이라고 굳게 믿는다. 깊게 독서하는 사람들만이 위대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Sue Graham Mingus 제공
해럴드 블룸은
'미국 문학비평의 거목'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며 세계 문단을 주도한 문학비평가다. 1930년 뉴욕에서 태어나 코넬대와 예일대에서 공부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신역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고 문학 그 자체에 대한 미학적 접근을 강조한다.
국내에는 그의 저서 중 '교양인의 책 읽기'(How to Read and Why·해바라기)가 소개됐고,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Where Shall Wisdom Be Found· 루비박스)가 2월 중 출간될 예정이다. 블룸 자신이 단편소설 41편과 시 83편의 문학작품을 가려 뽑은 '헤럴드 블룸 클래식'(생각의나무)도 최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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