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재미

'淸富'의 대명사 최부잣집 후손들 아직 부자로 살까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9. 4. 18. 12:35

 '淸富'의 대명사 최부잣집 후손들 아직 부자로 살까

 

입력 : 2009.04.18 03:13 / 수정 : 2009.04.18 11:43

"후손들은 아직 부자로 삽니까." 한 여성 관광객이 던진 질문에 문화해설사 최용부(68)씨가 답한다. "1947년 대부분의 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기부해 부자 가문의 막을 내렸습니다." (중앙일보 4월 3일자 보도) 

경주의 만석지기 최부잣집은 12대(代) 300년간 쌓아온 부(富)를 사회에 내놓은 '명부(名富)'다. 경북 경주시 교동 69번지 최씨 고택(古宅)은 평일에도 부자의 기(氣)를 느껴보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 최부잣집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300년

보통 최 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崔震立·1568~1636)부터 12대 최준(崔浚·1884~ 1970)까지 12대를 가리킨다. 300년을 내려온 재산은 최준이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막을 내렸다. 1947년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과 계림학숙을 세웠다.

중요민속자료 27호,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의 사랑채를 찾은 관광객들이 최용부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현판에 보이는 '둔차(鈍次)'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아호로,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대우헌(大愚軒)'은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아호로 크게 어리석다는 '대우(大愚)'에서 따온 것이다. / 채성진 기자

선대의 재산 희사(喜捨)로 더 이상 부잣집은 아니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도 올곧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최준의 손자 최염(崔炎·76)은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이다. 그의 장남 최성길(崔成吉·48)은 인천지법 부천지원 판사로 1남 1녀를 두고 있다.

13일 만난 최염씨는 여든 가까운 나이에도 꼿꼿하고 반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20대 후반 감사원의 전신(前身)인 심계원에서 근무했고, 1960년대 초반에는 영남대 재단에서 일했다. 10여년 전까지 의료법인의 이사장을 지냈다.

몇 년 전까지 방배동 빌라에서 살던 그는 지금 경기도 분당의 파크뷰 아파트 50평형대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없었지만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조상님의 음덕(蔭德) 때문"이라고 했다.

"참 부자의 시작은 공생(共生)"

최염은 어릴 적 고택 사랑채에서 조부에게 익혔던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을 다스리는 수신(修身) 덕목인 육연이 성문화된 가르침이었다면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 덕목인 육훈은 불문율이었다"는 것이다.

"대여섯 살부터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 초연하게 지내라) 대인애연(對人靄然·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평등하게 대하라) 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져라) 유사감연(有事敢然·일을 당하면 용감하게 대처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성공했어도 경거망동을 삼가라) 실의태연(失意泰然·실패했을 때도 태연히 행동하라) 글귀를 붓글씨로 항상 썼어요. 인생을 돌이켜보니 제게 가장 인상적인 항목은 실의태연이 아닌가 합니다. 허허."

그는 최부잣집이 '12대 만석'을 이어간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13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할아버지가 병자호란에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할 때가 69세였습니다. 청백리에 오르셨으니 부자는 아니셨겠지요."

그는 얼굴에 복면도 하지 않은 '명화적(明火賊)'이 11대조 최국선(崔國璿·1631 ~1682)의 집을 습격했던 일도 말했다. "침입자들을 관에 알리는 대신 '나 혼자 잘살아 무엇 하겠느냐'며 남은 노비 문서와 채무 서류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공생(共生)의 시작이 이때부터이니 '10대 만석'이 맞을 겁니다."

그는 "9대 연속 진사 합격자를 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통틀어 9명의 진사가 나온 것"이라고 했다. "다들 저를 최부잣집 종손으로 알고 있지만 종손은 따로 있습니다. 정무공 셋째 아들의 둘째 손자가 저의 10대조 할아버지니 저는 종손이라기보다는 주손(胄孫)인 셈이죠."

무슨 차를 타고 다니냐고 하자 최염은 'BMW'라고 했다. '역시 부자는…' 하고 감탄할 때 그는 "차 없이 지낸 지 꽤 됐다. BMW는 버스(Bus), 지하철(Metro), 걷기(Walk)의 줄임 말"이라며 웃었다.

화무십일홍·권불십년… 과욕의 끝은 패망

최염의 아들 최성길은 우신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부천지원 4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판결관련 서류가 탁자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지금은 부자도 아닌데 아직도 관심을 많이 가져 부담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고교 시절 그의 아버지는 "고운(孤雲) 최치원의 후예답게 중국어를 전공해 선조의 문화유산을 정리하고 계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아들의 의중을 떠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의 뛰어난 학과 성적은 결국 그를 법대 진학으로 이끌었다.

제3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최성길은 서울 동부지원(현 동부지법), 서울지법, 창원지법 판사를 거쳐 부천지원의 형사부 판사로 재직 중이다. 지금은 40여평의 용인 포스홈타운에서 살고 있다.

최염은 "요즘 권력자나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 불미스러운 얘기들이 많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뭐라 얘기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면서도 "부를 탐하고 지나치게 명예를 좇으면 결국 패망의 길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36년만에 제 모습

구한말 수많은 사연

대구=최재훈기자 acrobat@chosun.com
입력 : 2006.11.28 00:24 / 수정 : 2006.11.28 00:24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대명사 격인 경북 경주 최부잣집 고택(古宅)의 사랑채<사진>가 36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았다. 앞으로 별당과 낡은 대문채, 방앗간 등도 복원된다.

 

경주시와 영남대는 오늘(28일) 오전 경주시 교동 69번지 경주 최씨 ‘교촌가’(校村家·10대에 걸쳐 만석 재산을 유지해 온 경주 최씨 일가)에서 사랑채 준공식을 갖는다. 18세기에 신라 요석궁 자리에 지은 이 고택은 당초 99칸에 대지 2000평, 후원(後園) 1만평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후 규모가 줄어 대지1000평에 건물 5채만 남았고, 그나마 1970년 원인 모를 불로 별당과 사랑채를 잃었다. 방치됐던 사랑채는 작년 복원이 시작돼 5억3000만원을 들여 36평 옛 모습을 되찾았다.

  • 이곳 사랑채는 구한말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피신 왔었고,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선생이 의병 수백 명과 며칠 묵는 등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 일본 강점기에는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 경주 서봉총(瑞鳳塚) 금관을 발굴하려고 왔다가 묵었고, 의친왕 이강(李堈)이 엿새 머물고 집주인 최준(崔浚)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주었다고 한다. 최준은 최치원(崔致遠)의 28세 손이다.

    300년 만석꾼인 이 집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말라’,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등의 가훈을 받들어 일제 때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제공하고, 광복 후에는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의 설립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 때문에 고택은 현재 영남대 소유다. 영남대는 “교촌가 고택을 한국 전통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