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어 그거 애들 작문이나 하는 과목 아닙니까?”
최근 국어국문학과를 둘러싼 일련의 변화는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학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지방대 교수들을 만나면 ‘이제 천안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학생 모집이 안 되는 지역권 범위가 그렇다는 거지요. 그만큼 수도권 이내가 아니면 학과를 불문하고 신입생을 모으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국어국문학과는 어떻겠습니까.” 박기수 교수는 “교수들 중에는 수년 내 수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내놓는 분도 있다”고 말했다. 국어국문학과의 변신에 적극 앞장서고 있는 대학들이 대개 지방대, 그 중에서도 (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립대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권 대학이라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입장은 아니다.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인 40대 중반의 한 교수는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서울대 인문대는 연세대 의대보다도 커트라인이 높았다. 그런데 요즘은 전국 모든 의대 커트라인보다도 훨씬 낮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커트라인이 낮아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과 정원이 줄어드는 사태까지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문학의 변신에 관해서는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성교(75)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지금과 비슷한 논쟁이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 성신여대 인문대학장을 했어요. 그때 교양 과정에서 국어를 없애는 문제로 한창 논쟁이 벌어졌지요. 당시 내 옆에 화학과 모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학장님, 국어 그거 애들 작문이나 하는 과목 아닙니까?’ 그래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목이 쉴 정도로 국어의 당위성을 주장해 결국 관철시켰습니다.”김선학(63)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매 학기 첫 번째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쪽지를 나눠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한자로 써 보게 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제대로 쓰지만 ‘삼국유사’는 ‘三國有史’로 쓴다고 한다. 그는 “한글로 쓰면 되는데 왜 굳이 한자로 써야 하느냐”는 학생들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요즘 국어국문학과의 위기를 돌아본다고 했다. “남겨진 여러 가지 일이라는 유사(遺事)의 뜻을 알아야 삼국유사의 야사적 특성과 저자 일연의 집필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요. 국어국문학의 존재도 한자 같은 것 아닐까요? 당장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없애버리겠다는 공리적 발상은 위험합니다.”
조선 중기 고전문학을 전공한 정소연(31)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서울대 국문학 박사)는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이른바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에 빗대 요즘 상황을 해석했다. “문이재도론에서는 문(文)은 도(道)를 담는 그릇이라고 봤습니다.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은 내용물(道)이고 그걸 담는 그릇(文)은 비본질이라는 뜻이에요. 이 논리에 따르면 정통 국문학은 전자, 최근 각광 받는 문화 콘텐츠나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후자가 아닐까요? 결국 비슷한 논란이 시대가 바뀌면서 계속 되풀이되는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바뀔 뿐, 그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평행사관’이죠.”
‘국문학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쪽의 반론도 팽팽하다. 이들 주장의 가장 큰 주제는 과거 수십 년간 이어져온 국어국문학 고유 영역의 축소다. 국어 교사는 국어교육학과에, 언론 분야는 신문방송학과(언론정보학과)에, 창작 영역은 문예창작과에 빼앗겨 ‘국어국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이 갈수록 좁아진다는 논리다.
특정 시대와 인물, 장르에 한정된 전공을 가진 몇 명의 교수진이 국어국문학의 방대한 커리큘럼을 깊이 있게 소화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정해진 시간에 너무 많은 내용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졸업하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부생의 급격한 감소 역시 기존 국어국문학과로서는 ‘이상 신호’다. 수도권 대학의 한 국문학과 교수는 “옛날엔 1~2학년 때부터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학생이 나오곤 했는데 요즘 국문과 우수 졸업생들은 국문과 대학원이 아닌 통역대학원에 가겠다고 한다.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며 “우수한 학생이 대학원으로 안 오는 것은 해당 학과로서는 굉장히 위험한 신호”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문학의 변신을 주장하는 학자들조차도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아류 국문학과’의 등장은 달가워하지 않는 입장이다. “디지털 콘텐츠 부문은 역사가 오래지 않아 전문가층이 굉장히 얇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40대 이후는 없다고 봐야 해요. 나머지는 이름만 바꿔 활동하는 거죠.”(한혜원 교수) “시중에 나와 있는 문화 콘텐츠, 디지털 스토리텔링 관련 책의 90%는 가짜예요. 제대로 된 분석 없이 껍데기만 바꾼 거죠. 이쪽 분야는 철저하게 실용성, 현장성 위주로 움직이기 때문에 업계 쪽 전문가가 상당히 많습니다. 오히려 학교 쪽에는 제대로 된 전문가 집단이 적은 편이에요.”(박기수 교수) 특히 박 교수는 “문화 콘텐츠 분야는 국문학뿐 아니라 사학, 철학 등 모든 인문학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며 “분야 간 협업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각 전공들이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식의 지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어 제대로 된 연구 성과가 나오기 힘든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 “국문학의 경쟁력은 이야기… 계속 발전시켜야”
안경환 비아이그룹 제작본부장은 9월 초 종영된 MBC 애니메이션 ‘먹티와 잼잼’을 기획, 제작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업계에서 오랫동안 실무 경력을 쌓은 그 역시 서울산업대와 세종대에서 디지털 콘텐츠 관련 교양 강의를 진행한다. 그의 수업을 듣는 수강자의 40%는 국문학 전공자다. “사실 디지털 콘텐츠 분야에서 국문학이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은 일부분이에요. 물론 매체 환경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콘텐츠 성격도 달라져야죠. 그렇지만 콘텐츠 탑재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원천 소스를 개발하는 것이고, 그게 국문학의 영역이에요. 농사로 따지자면 괭이나 호미를 만드는 대장장이 같은 역할이랄까요?” 안 본부장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하는 한국의 문화원형사업에서 ‘한국의 호랑이’ 편에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설화나 전설, 민담 속의 호랑이 캐릭터와 관련 이야기를 찾아내 그걸 애니메이션, 삽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작업의 시작은 늘 인문학자들이에요. 그 분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일이죠.”설기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기반조성본부장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중 ‘드라마티카(Dramatica)’라는 게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과 대강의 이야기 줄거리를 집어넣으면 자동으로 해당 캐릭터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사용자의 의도에 맞게 플롯을 체계화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지요. 그렇지만 그게 창작의 끝은 절대 아닙니다. 기본 도구일 뿐이에요.” 그는 외국에 비해 빈곤한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탄탄하지 못한 인문학 교육에 있다고 믿고 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 ‘디지털’은 언젠가 더 좋은 기술이 나타나면 변하겠죠. ‘텔링’ 역시 진행형이므로 변할 수밖에 없고요. 결국 변하지 않는 본질은 ‘스토리’, 곧 이야기이고 이걸 인문학에서 해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