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만화를 만날 수 있다. TV드라마만 보더라도 ‘다모’(2003), ‘궁’(2006), ‘쩐의 전쟁’(2007) 그리고 현재 방영 중인 ‘식객’(2008) 등이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이밖에도 ‘타짜’ ‘버디’ ‘바람의 나라’ 등 올 하반기 기대작으로 꼽히는 대작들도 만화가 원작이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영화, 게임, 연극, 뮤지컬 등에서도 이미 만화는 중요한 이야기 소스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지금을 ‘만화의 르네상스’라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화잡지 평균 4000원…10년째 제자리
미디어에 노출되는 만화는 늘어나지만 활자로 된 만화책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신인만화가 발굴의 발판이 되고, 신작 홍보가 이뤄질 수 있는 만화전문잡지는 몇 년 전부터 줄줄이 폐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 ▲ 드라마 '바람의 나라'(KBS) / 드라마 '타짜'(SBS) / 영화 '타짜'
- 사정이 이렇다보니 10년 동안 물가는 2배 이상 올랐지만 만화잡지의 평균 가격은 4000원(월간 기준), 일반적인 단행본 만화책 한 권의 평균가격은 3000~4000원 안팎으로 동결 상태다. 책값이 그대로이니 만화를 창작하는 만화가들의 인세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한국만화출판협회 사무국장 전황수씨는 “출판사마다 신인작가 발굴을 위한 공모전을 실시하고 있지만, 국내의 도서(만화)대여점과 불법스캔만화로 만들어진 기형적인 만화산업구조로 인해 새롭게 출판되는 한국만화 수와 데뷔하는 작가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발행한 ‘2007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국내의 대표적인 만화전문출판사인 서울문화사, 대원씨아이, 학산문화사 등에서 발행하는 만화잡지의 판매부수도 5000부 내외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1차 태풍’ 도서대여점… 만화는 빌려보는 것?
국내 만화산업을 휘청거리게 한 시발점은 동네마다 쉽게 볼 수 있는 ‘도서대여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만화업계는 ‘풀하우스’ ‘짱’ ‘오디션’ ‘힙합’ 등 지금까지 명작으로 손꼽히는 만화들을 줄줄이 배출하며 성장해 왔다. 천계영, 김수용, 이빈, 전극진 등 수많은 매니아층을 거느린 젊은 만화가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데뷔했다. 1998년 창간해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학산문화사의 순정만화 전문잡지 ‘파티’는 창간호부터 매진행렬을 기록했다.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용돈을 모아 ‘파티’나 ‘밍크’를 사서 보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IMF 이후 도서대여점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2000년을 기점으로 국내 만화출판산업은 급격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만화는 ‘사서 보는 것’이 아닌 ‘빌려서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대중의 인식 속에 박혀버렸다.
- 스타작가가 아닌 이상 만화가들이 평균적으로 받는 인세는 만화책 정가의 10% 정도. 3000원짜리 만화책이 한 권 팔리면 300원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대여의 경우 만화가 아무리 인기를 끌어도 만화가가 받는 인세는 늘어나지 않는다. 대여순위가 1위든 100위든 만화가가 받는 인세는 대여점에서 구매할 때 단 한 번뿐이다. 한 만화가는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에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화가가 됐지만 점점 심해지는 생활고로 인해 만화를 그리는 것이 너무 힘들다. 도서대여점이란 이름으로 만화대여를 하는 곳에서 내 만화를 봤다는 사람들이 팬이라고 할 때 일할 맛이 떨어진다’는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업계에는 전기료도 내기 힘들어 하는 만화가들도 많다고 알려져 있다.
‘2차 태풍’ 온라인 불법유통… 피해액 1583억원 넘어
대여점보다 만화가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한 불법공유다. 전문적인 B-boy 댄스와 댄서들의 이야기를 다뤄 국내 B-boy문화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 만화 ‘힙합’은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만화잡지에서 연재된 내용이 스캔되어 불법으로 유포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힙합’의 작가 김수용씨는 항의 표시로 3개월간 일을 쉬었다. 이후 김씨는 자신의 만화를 통해 “차라리 대여점에서 빌려서 봐라. 내가 열심히 그린 만화가 불법 스캔되어 흐릿한 이미지로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싫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불법으로 공유되는 만화는 영화·음악 등과 같은 디지털소스가 아니다. 만화책이나 만화잡지로 출간된 출판물을 스캔해서 올린 이미지 파일이다. 최근에는 포털이나 만화대여 전문사이트에서 만화를 온라인상으로 ‘대여’한 뒤 스샷(모니터에 뜬 화면을 이미지 파일로 저장하는 것)해 P2P사이트에 유포하기도 한다. 만화저작권보호 협의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인터넷 불법공유로 인한 피해 추정액은 총 1583억원. 올해에도 380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오프라인 도서대여점과는 달리 온라인사이트에서 작품을 연재할 경우 이용객이 만화를 보는 만큼 만화가가 일정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의 만화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꺼리는 만화가도 있다. 대원씨아이의 오태엽 국장은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도 온라인 불법유통으로 인해 자기 작품이 인터넷에 올라가는 것을 꺼리는 작가들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만화는 백해무익” 수십 년 잘못된 인식도 한몫
최근 들어서는 불법다운로드를 근절하기 위한 저작권법이 힘을 발휘하면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만화가 점점 줄고 있기는 하다. 이는 한국만화가협회, 한국만화출판협회, 문화콘텐츠진흥원이 함께 만화저작권보호협의회 활동을 하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저작권보호협의회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든지 인터넷 불법만화유통을 신고할 수 있고, 신고 현황을 공개함으로써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한국만화가협회 신경순 사무국장은 “불법적으로 스캔·스샷한 만화를 공유하는 카페, 클럽, 사이트 등을 신고하는 단체가 늘어나고 저작권과 관련된 내용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피해규모나 신고 건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만화출판협회 전황수 사무국장은 “만화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면서 문화적인 지위는 성장했지만 아직까지도 ‘만화는 백해무익하다’는 인식이 크다. 만화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만화 수출 '적신호' |
재작년 40억원 수출… 최근 국내시장 침체로 주춤
국내에서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만화산업이지만, 2000년 이후 국내 만화의 해외수출은 성장세에 있었다.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의 주빈국 전시는 세계시장에 한국 만화를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2006년에만 391만7000달러의 수출 규모를 자랑했다. 또 김동화 작가의 ‘빨간 자전거’가 프랑스만화비평협회가 선정하는 프랑스 ‘2005만화비평대상’에 노미네이트됐고, 형민우 작가의 ‘프리스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발행한 ‘2007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국산 만화의 해외 수출은 최근 들어 주춤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로는 국내출판만화 시장의 침체를 꼽았다. 만화잡지의 잇단 폐간으로 신인작가와 신작의 등장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지면서 수출 가능한 작품의 수도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수한 신작이 발굴될 수 있도록 국내 만화 창작과 제작 환경의 개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 김소연 인턴기자ㆍ성신여대 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