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잡기

등소평(鄧小平)과 개혁개방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8. 12. 20. 08:35
[만물상] 등소평(鄧小平)과 개혁개방
이선민 논설위원 smlee@chosun.com
1974년 4월 중국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총회에 참석한 뒤 뉴욕과 인근을 돌아봤다. 그는 브로드웨이의 마천루와 타임스스퀘어 지하철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귀국 후 덩은 "몇 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그는 훗날 아들에게 미국 유학을 권하면서 "현대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78년 11월 싱가포르 방문을 마친 덩샤오핑을 공항에서 배웅한 뒤 리콴유 총리는 "중국 보좌진이 비행기에서 혼쭐날 것"이라고 말했다. 덩이 중국측 준비자료엔 없는 싱가포르의 발전상에 크게 감명받았다는 얘기였다. 싱가포르를 '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라고 비판하던 인민일보는 얼마 뒤 "녹화·공공주택·관광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덩은 "외국자본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싱가포르에서 배웠다"고 연설했다.

▶덩샤오핑의 경제 우선주의는 1962년 '흑묘백묘(黑猫白猫)론'에 이미 드러났다. 그는 대약진운동으로 3000만명이 굶어죽는 대재앙이 터지자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윤 동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장은 그가 문화대혁명 때 '주자파(走資派)'로 몰리는 빌미가 됐다. 그러나 그는 노회한 정치력으로 4인방을 비롯한 정치 우선주의자와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았다.

▶중국 공산당이 그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선언 30년을 맞아 신해혁명(1911년)과 사회주의혁명(1949년)에 이은 '제3차 혁명'으로 규정했다. 덩은 두 차례 실권(失權)과 복권(復權)을 거듭한 끝에 1978년 12월 공산당 제11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최고지도자가 됐고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이듬해 선전(深�), 주하이(珠海) 등 네 곳이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중국 역사가들은 마오쩌둥을 '파(破)의 지도자', 덩샤오핑을 '입(立)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이념과 혁명에 매달렸던 마오와 달리 덩이 국가 건설에 눈을 뒀던 것은 20세를 전후해 6년간 프랑스에서 근로유학생인 근공검학단(勤工儉學團)으로 살면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라 안만 본 마오와 나라 밖을 경험한 덩의 엄청난 차이에서 젊은 날 체험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한다.


 

입력 : 2008.12.19 22:19 / 수정 : 2008.12.19 2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