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사교육 이길 수 있다]
3교시는 학원 선생님, 4교시는 학교 선생님
청도=오현석 기자 socia@chosun.com
김병주 인턴기자 (한양대 사회학과 4학년)
입력 : 2009.08.18 03:22
청도 모계高
학교 강의 전면 개방 외부 강사와 공동 수업
학생들은 대만족 교사들에겐 '자극제'로
"3교시는 어느 쌤(선생님)이 가르치는 영어 시간이야?" (1학년 정찬영군)
"학원 쌤 수업이야. 4교시 영어가 학교 쌤이고." (1학년 황지호군)
경북 청도군 화양읍의 모계고등학교 1학년 1반 교실 게시판에 적힌 여름방학 보충수업 시간표에는 국어·영어·수학 과목 이름 뒤에 A·B라는 기호가 함께 적혀 있다. A는 이 학교 선생님이 가르치는 시간이고, B는 인근 학원에서 초빙한 강사가 진행하는 수업이다.
전교생 450명의 시골학교인 모계고에서는 지난해 2학기부터 공교육과 사교육을 접목하는 실험이 시작됐다. 학기 중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대구 청솔학원에서 양준 원장을 비롯한 강사 6명이 와서 하루 4시간씩 특강을 했고, 이번 여름방학에는 인근 지역 대학강사 1명과 학원 강사 4명이 1학년 보충수업 500시간 중 325시간(61%)을 담당했다.
- ▲ 모계고등학교 1학년 1반 교실에서 쉬는 시간에‘학교 교사’인 손진욱(40)씨(오른쪽)와‘학원 교사’인 배미주(왼쪽)씨가 학생들 질문을 받고 있다. 이 학교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혼합해 학생 만족도를 높였다. /이재우 기자 jw-lee@chosun.com
◆학생은 만족, 교사는 자극
학원강사들이 함께 가르치는 것에 대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김다희(16)양은 "학원 쌤은 교재에 나온 문제를 풀어주시면서 그 유형에 쓰는 지식들을 따로 정리해주세요"라며 "영어·수학 실력과 별개로 문제풀이에 바로 쓰기에는 학원 쌤 수업이 좋다"고 했다.
황지호(16)군도 "학교 쌤은 전반적인 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시고 학원 쌤들은 문제풀이 요령을 가르쳐주시니 각자 장점이 있다"며 "학원 안 다녀도 뒤처지는 게 없다"고 말했다.
여름방학 보충수업 7일째인 지난달 31일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서도 학원 강사 초빙 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게 나타났다. 과목별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강의 준비가 충분한가" "전문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체 학생 중 70~90%가 '5점(매우 만족)' 또는 '4점(만족)'으로 응답했다.
교사들에게는 학원 강사와 함께 하는 수업이 자극제가 됐다. 수학과목 박성흠(40) 교사는 "12년 교직생활 동안 이렇게 전면적으로 학교 강의를 개방해 외부강사와 공동 수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학원 강사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학교가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수업준비를 좀 더 하게 된다"고 했다.
영어과목 손진욱(40) 교사도 "강사들의 수업을 보니 매시간 꼼꼼하게 시험을 치르고 학생들의 이해도를 고려해 그다음 수업을 진행하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강의 기법을 많이 참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문균 교감(55)은 "학원 강사들이 오다 보니 선생님들도 은근히 경쟁심을 느끼시지 않겠느냐"며 "우리 교사들도 이번 보충수업에는 수업 준비를 2배쯤 더 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위기감이 변화 낳았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교직 사회에서 외부 강사에게 수업을 개방하기란 쉽지 않다. 좋은 대학을 나와 '고시'라고 불리는 교사 임용과정을 통과한 교사들은 통상적으로 학원 강사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모계고가 이런 보수성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유례없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지역 명문고로 군림하던 모계고등학교에는 지난 2003년 개교 이래 처음 겪는 신입생 미달 사태가 벌어졌고, 이는 2006년까지 4년 연속 이어졌다.
청도군이 'TK(대구 경북) 8학군'이라 불리는 대구 수성구에 바로 붙어 있어 많은 학생들이 대구로 진학한데다가, 농촌지역이라 인구가 계속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예전에는 모계고로 진학하던 청도군 상위권 학생들이 매년 과학고나 외국어고로 빠져나간다는 점도 충격이었다.
"이러다가는 학급 수를 줄여야 한다"는 위기감이 학교를 감쌌다. 학급 한개가 줄면 교사를 2명씩 줄여야 하기 때문에, 구조조정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교감이었던 김정웅 교장(58)은 "청도군 인구 통계를 들여다봐도 신입생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교사들 사이에서 '외지(外地) 학생을 유치 못하면 학교가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생겼다"고 했다.
거듭된 회의 끝에 이 학교 교사들은 학교를 오히려 공격적으로 '경영'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인근 명문 고교를 다니면서 상위권 심화 특별반, 주말 특강, 365일 연중무휴 기숙사 등의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고, 지역의 우수한 중학생 유치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신입생 모집 경쟁률이 2007년 1.1대1, 2008년 1.8대1, 2009년 2.3대1로 계속 높아졌다. "학교가 열심히 가르친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청도·경산·대구 등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구미·울진·울산 학생들도 신입생으로 찾아왔다. 심지어 서울이나 부산에서 주소를 바꿔 진학한 학생들도 생겼다.
김정웅 교장은 "인구가 줄어드는 시골 학교들은 경쟁에서 못 이기면 폐교밖에 없다"며 "실력만 있으면 간판 없이도 '명문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모계고는 지난달부터 홈페이지 첫 화면에 "특목고·자사고를 뛰어넘겠습니다"는 문구를 띄우고 있다. 자신감이 붙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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