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기사

김영삼 정부 때 교육개혁안 만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1)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8. 2. 9. 12:30
새 정부 교육개혁안에 대한 비판과 제언

김영삼 정부 때 교육개혁안 만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13년 전 우리 것과 비슷 방향 옳지만 서두르면 안돼"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발단은 이명박 정부의 교육공약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던 지난 1월 초였다. 자료를 뒤지던 중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교육정책에 대해 “김영삼 정부 시절 ‘5·31 교육개혁안’과 다를 게 없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5·31 교육개혁안이란 김영삼 정부 출범 2년 3개월 만인 1995년 5월 31일 당시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인 교육개혁위원회가 내놓은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의 다른 말.

호기심이 일어 자료를 좀더 뒤졌다. ‘열린 교육체제 구축을 통한 교육복지국가(Edutopia) 건설’을 비전으로 내세웠던 이 개혁안의 기본 특징은 ‘학습자 중심의 교육’ ‘교육의 다양화’ ‘자율과 책무성에 바탕을 둔 학교 운영’ ‘자유와 평등이 조화된 교육’ ‘교육의 정보화’ ‘질 높은 교육’ 등이었다.

당시 개혁위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학의 다양화와 특성화’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학입학제도’ ‘학습자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는 초·중등교육 운영’ 등을 제시했다. 과연 상당 부분 이 당선인의 공약과 일치했다. 구체적 실천 계획을 살펴보니 유사성은 더욱 명확해졌다. ‘대학정원 및 학사운영 자율화’ ‘수능·논술·면접 선택 전형자료로 활용’ ‘중·고교 선지원 후추첨제 도입’…. 표현만 다를 뿐 인수위가 내놓은 교육정책 방향과 거의 같았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전부 5·31(교육개혁안) 연장선상이에요.” 당시 교육개혁위 상임위원으로 개혁안의 뼈대를 만든 이명현(66) 전 교육부 장관과 전화가 연결됐을 때 들은 첫 이야기다. “이주호 의원(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교육문화분과 간사)은 5·31(교육개혁안) 만들 때 함께 일했던 전문위원입니다. 지난 10년간 겨울잠 자던 정책이 새 정부를 만나 빛을 본 거지, 전혀 없던 정책을 갑자기 들고나온 건 아니에요.” 지난 1월 22일 그를 만났다.


이명박 교육정책
대부분 교육부서 잠자던 내용 끄집어낸 것
수준별 교육·대입 자율화도 다 나왔던 계획


이 전 장관은 자리에 앉자마자 요즘 언론에 대한 불만부터 쏟아냈다. “신문을 보면 우리나라 교육에 청천벽력이 일어난 것 같아요. 실은 교육부 정책 목록에 다 있던 것을 끄집어낸 것뿐인데….”

그에 따르면 5·31 교육개혁안을 만들 당시 이미 평준화 정책을 보완하기 위해 자립형 사립고 제도와 수준별 교육과정을 제안했고 고등교육법을 손질해 대학 운영과 학생 선발에 관한 학칙을 대학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1995년에 완성된 개혁안이 예고 기간 3년을 거쳐 1998년 3월부터 시행됐고 그 사이 정권이 바뀌면서 정책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학은 정부 눈치 보느라 새 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교육부 관료들은 바뀐 법대로라면 권한이 축소되는데 제재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히려 활개를 쳤지요. 바뀐 대통령이 교육법을 다 압니까. 그렇게 묻힌 게 10년이나 이어진 거예요.”

그러나 그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지난 두 정부가 5·31 교육개혁안을 깡그리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 초기 교육부장관이었던 이해찬씨도 ‘5·31(교육개혁안)대로 간다’며 기자회견을 몇 번이나 했어요. ‘대한민국 교육 40년’(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 건넸다는 책)에도 5·31(교육개혁안)에 관한 내용이 언급돼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얼마 전 노무현 정권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조기숙씨가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라는 책을 보내왔는데 거기도 5·31(교육개혁안)이 맞더라 하는 얘기가 나와요. 다들 자기 입장과 처지에 맞춰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거죠.”


사교육 없어질까
좋은 학교 수백 개 만든다고 해결되나
성공 자신한다지만 구체적 내용 부족


이명현 전 장관은 인수위가 한창 교육 관련 청사진을 쏟아내던 1월 초, 평소 알고 지내던 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른바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와 관련, “좋은 학교가 많아지면 과외비가 절반은 줄어들 것”이라는 인수위 측의 핑크빛 전망이 언론에 연일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란 기숙형 공립고, 자율형 사립고, 마이스터고 등 다양한 성격의 고교 300개를 만들어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이명박 당선인의 공약이다.

“그런 얘기하면 나중에 책임 못 진다 그랬어요, 내가. 사교육을 왜 시킵니까. 좋은 학교 가려는 마음 때문 아닙니까. 정말 사교육을 없애려면 학부모의 그 마음, 학생의 그 마음을 없애야죠. 그게 없어지겠어요? 괜찮은 학교가 100개 더 생기면 전교 1등만 준비하던 시험을 전교 20~30등도 준비하게 되면서 관련 사교육 시장이 더 커질 거예요.

시장은 그렇게 반응하게 돼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지 몰라도 당장은 어림없어요. 정책 입안 단계에서 과외비 잡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건 국민을 호도하는 거예요.”

그는 “구체적 안이 나와 봐야겠지만 지금 발표된 것만으로는 새 정부의 교육 정책을 총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구체적 내용이 뭐 있습니까. 대입 자율화도 두루뭉수리하게 언급돼 있고 학교 300개 세운다는 게 전부지요. 그렇게 몇 개 찔끔 바꾼다고 해서 교육이 좋아질 것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교육은 그렇게 간단치 않아요.” 그는 교육을 자동차에 비유하기도 했다. “1000만원짜리 자동차가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최고급 세단의 부속품 하나를 끼워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다른 부속품이 그것 때문에 다 망가집니다. 고물 차에 고급 엔진 단다고 해서 좋은 차 되는 것 절대 아니지요. 좋은 엔진을 견뎌내지 못해 주저앉아 버립니다.”

 

해외유학 갈 필요없다?
국제사회 따라가려면 많이 나가서 배워야
한국의 기러기 아빠들은 모두 애국자


인터뷰 내내 이 전 장관은 “교육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그런 생각은 패배주의 아니냐”고 반문하자 그는 “내 얘기 좀 들어보라”며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5·31 개혁안에 수준별 교과과정에 관한 논의가 있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그 쪽에 관심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고 배워온 거였죠. 그런데 막상 우리나라에 도입하려고 보니 개념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심지어 유명하다는 교육학자나 시도교육감조차 수준별 교육을 우열반 편성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디다.

생각해 보세요. 선진국의 훌륭한 교육 제도가 있어도 그걸 체험해본 사람이 있어야 제대로 시행할 수 있지 않겠어요? 좀더 많은 학생이 해외로 나가 선진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서 그걸 우리나라에 적용하고, 그 혜택을 받은 학생이 다시 후진을 양성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교육이 제대로 선다는 얘깁니다. 특정 정권에서 섣불리 해결을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명현 전 장관은 1960년 대학에 입학한 일명 ‘4·19 세대’다. “그때만 해도 우리를 가르친 교수라는 분들 수준이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었습니다. 학부만 졸업해도 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1970년대 중반에 나는 학계에서 엄청난 보배 대접을 받았죠. 지금요? 그때 나 정도 지식은 학부생도 다 갖고 있어요. 우리 교육이 지난 40여년간 그만큼 서서히 성장해 온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우리나라 특유의 교육열이나 ‘기러기 아빠’ 문제도 부정적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지고 보면 기러기 아빠는 애국자입니다. 본인 한 명을 희생해서 자녀에게 선진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거잖아요.

10여년 전부터 고교 해외 유학 붐이 일었죠. 그 덕에 미국 명문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지금 상당수 다국적 기업 한국지사에서 유능한 인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져야 모방이라도 할 게 아닙니까.”

내년 3월 전격 시행되는 로스쿨 제도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이 전 장관은 만감이 교차한다. 로스쿨 제도의 기반이 된 전문대학원제 역시 5·31 교육개혁안에 포함된 내용 중 하나다.

 “한·미 FTA가 체결돼 5년 후면 미국 변호사가 대거 우리나라에 진출합니다. 이에 맞서 국내 법조인의 경쟁력을 키우려면 로스쿨 도입은 필연적이에요. 그걸 예측해 1995년 당시부터 계속 주장했지만 반대하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국가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이익부터 챙기는 풍토 때문이었죠.”

그가 개혁의 칼자루를 쥐었다 낭패를 겪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 계열별 모집을 법으로 규정한 것도 나예요. 미래 사회엔 한 가지 전공보다 여러 전공을 두루 잘할 수 있는 인재가 대접 받을 거라고 예측하고 만든 제도였죠. 그런데 자기 밥통 지키려는 욕심에 교수가 반대하고 학생 규합이 어려워진 총학생회가 반대하고 덩달아 학생들까지 반대하는 통에 본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절름발이 규정이 돼 버렸어요. 진정한 학교 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학교운영위원회 역시 제 역할을 못하긴 마찬가지이고요.”

그가 ‘규제’보다 ‘자율’에 방점을 찍은 새 정부의 교육 정책안에 우려를 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의 대상이 되는 국민의 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안겨주는 자율은 자칫 방종과 집단 이기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한 예로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학생 선발 기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잘 모르는 사람 눈에 아이비리그 대학이 신입생을 뽑는 과정은 굉장히 주먹구구식처럼 보입니다. 전형 요소도 10가지 이상 되지요. 공부 잘한다고 무조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에요.

유학 시절 동료 교수 중에는 윌리엄스 칼리지라는 단과대에 떨어진 후 하버드대에 합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면접 때 3~4명의 입학사정관이 한 학생의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데 그 과정의 공정성에 대해 어떤 학부모도 시비를 걸지 않아요. 대학 입학 절차의 투명성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떨까요. 대학에 학생 선발권을 주기 전에 국민들의 대학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조선일보 최혜원 기자 happyend@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