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몰입교육 하나요, 안 하나요?
연초부터 슈퍼에서도 구할 수 없는 과일‘아륀지’가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렸다. ‘영어몰입교육’이라는 단어를 회자시킨 정부는 극심한 반대 여론에 그 기세를 꺾은 분위기다. 되레 영어몰입교육을 전면에 내세운 몇몇 사립초등학교들이 주목받고 있다. 공교육을 따르자니 미심쩍고, 사교육을 따르자니 야윈 지갑이 한스럽다. 초등 영어교육, 어디쯤 가고 있을까.
영어에만 몰입?
처음‘영어몰입교육(English Immersion Program)’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건 ‘몰입’이라는 단어의 추상성 때문이다. 영어교육이라는 낡은 단어에 달랑‘몰입’하나 추가했을 뿐인데 국민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몰입’의 방법과 정도가 대체 어느 수위인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실상 영어몰입교육은 영어만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육을 뜻하는 단순한 말이다. 영어 수업시간에도 한국어를 병행했던 수업 방식을 버리고 영어 외의 과목까지도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영어교육마저 혁신시키겠다는 포부의 발로였다.
이른바 영어몰입교육은 교육계는 물론이요, 전 국민적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애당초 정부의 계획은 야심찼다. 경제자유구역과 국제자유화도시에서 영어몰입교육을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제주에서는 올해 3월부터 초·중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세부적인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영어 공교육 혁신 철학은 굳건해 보였다. ‘일주일에 몇 시간만 공부해서는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당선인 시절 바른정책연구원을 통해 초등학교 3학년 영어몰입교육 도입과 2012년 대입 자율화 일정을 제시했다. 교육부도 거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였던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의 이행을 위해 초등 영어 공교육 도입을 1학년으로 앞당기는 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교육부는 이미 외국 사례들을 살펴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연구들을 진행했고 커리큘럼의 구성과 적합성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처음으로 연구학교를 선정해 영어몰입교육의 타당성 연구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새 정부는 한국식 토익인 영어능력평가시험의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밝혀 영어몰입교육이 현실화될 것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영어몰입교육은 전 국민적 지지와 신뢰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한 감이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이경숙 위원장이 발음한 ‘아륀지’는 비아냥 섞인 유행어가 되었고, 국민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다음 제안을 기다렸다.
학부모들은 정부의 교육정책이 사교육을 더욱 조장할 거라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부풀대로 부푼 사교육비가 영어몰입교육으로 인해 속력을 더할 것이라 여겼다.
지난 3월 이명박 대통령은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고 밝히면서 영어몰입교육을 백지화시킨 바 있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한 지 200여 일이 되어가는 지금, 서울 시내 578개 초등학교 가운데 30개 학교에서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7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공립초등학교 13개교, 사립초등학교 17개교가 영어 외의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연구학교인 광남초등학교를 포함한 4개 학교를 제외하고는 교사 개인이 연구수업을 진행하는 정도라고 밝혔다. 그에 반해 일부 사립초등학교에서는 영어몰입교육 시행을 전면에 내세우며 홍보하고 있다. 물론 교육 내용과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영어 과목 외의 수업까지 영어로 진행하는 예도 있고, 수준별 영어 수업, 교환 프로그램, 인증제 도입 등을 시행하는 곳도 있다.
공립초등학교, 실용 영어 완성을 꿈꾸다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건 분명한 매력만큼 엄청난 파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은 그 누구보다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세대이다. 연령대는 대략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 대부분 80년대 학번으로 학력고사 세대이다.
이 세대는 사실 문법과 독해 분야에는 뛰어날지 몰라도 정작 살아 있는 영어, 말하는 영어에는 취약하다. 읽고 듣는 것은 되는데 말하기가 되지 않으니 스스로‘벙어리 영어’밖에 못한다고 자조할 만도 하다. 그런 세대에게 말하기 중심의 영어교육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해외 어학연수와 유학이 불러온 21세기형 이산가족과 기러기아빠의 폐해는 뉴스가 아니더라도 옆 자리 동료의 하소연을 통해 더 실감나게 듣는 이들. 그들에게 국내외를 막론한 사교육 경비는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라면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라도 사교육비 앞에서 벌벌 떨게 된다.
교육환경은 또 어떤가. 내 나라, 내 문화를 제대로 접하기도 전에 낯선 이국땅에 어린 자녀를 보내는 것을 어떤 부모가 마뜩해할까. 그러하니 영어교육에 있어 학부모들의 번뇌를 해결해줄 대안은 영어몰입교육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공교육 내에서 제대로 실현되어 진정 사교육비의 거대한 압박에서 해결시켜줄 수 있다면 말이다.
서울시교육청의 교육과정정책과 이향식 영어교육장학관은 공립초등학교의 영어교육이 학부모들의 우려와 달리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에 따르면 공립초등학교 영어교육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영어 외의 과목까지 영어로 가르치는 몰입이 아니라 실용영어 사용능력의 신장이다. 그 실행방안의 일환으로 교사, 교육과정, 교육환경 등을 개선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공립초등학교 영어교육의 핵심은 교사이고, 그들의 영어 수업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교사 연수 프로그램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1개월 집중 합숙 프로그램, 6개월 심화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영어로 수업이 가능한 교사들을 대상으로 집중 연수를 실시한다(모든 초등학교 교사가 영어를 지도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사정에 따라 담임교사가 하는 경우도 있고, 영어전담교사가 하는 경우도 있다).
원어민 교사도 일부 채용해 그들을 통한 연수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영어 실력이 강화된 교사의 수가 늘어나고 퇴직이나 전직 등으로 인한 자연 감소가 이루어지면 영어 실력을 갖춘 교사들의 비율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서울시교육청의 전망이다.
교육과정에 있어서는 실용영어를 위해 교과서 위주의 수업 방식이 아니라 실제 학생들이 영어로 말하고 활동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다. 영어 활동수업이 가능한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다. 교사와 학생이 마주보고 수업하는 방식, 기존의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방식이 아닌 모둠 활동이 가능한 수업 형태를 만들고자 지역청마다 영어전용교실, 영어체험교실 등을 시범학교에 설치, 운영 중이다. 2010년까지 모든 초등학교에 확대, 설치할 예정이다. 영어방송 수신 환경 개선이나 영어도서 코너 마련, 컴퓨터 활용 영어교육 등은 학생들에게 영어가 보다 친근한 언어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려는 또 다른 방안들이다.
직접 물었더니…
‘몰입’이 아니라 ‘강화’입니다
서울시교육청 교육과정정책과 이향식 영어교육장학관
“초등 영어교육에 대한 강화 정책은 새 정부 출범에 맞추어 시작한 게 아닙니다. 2001년부터 영어교육 개선 계획, 활성화 계획, 내실화 계획을 진행해 왔고 현재는 영어교육 강화 계획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영어 외의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공교육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사교육이 늘어나는 건 분명합니다. 영어교육이 강화되면 사교육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저희는 그 반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교육 내에서의 영어교육, 즉 교사와 커리큘럼이 우수하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여러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교사들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원어민 교사는 대안이 될 수 없죠. 결국 우리네 교사들이 우수해져야 합니다.
사립학교 못지않은 영어교육 환경을 마련하는 데도 힘쓰고 있습니다.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수준으로 영어교육을 끌어올리면 사교육비는 감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공교육의 목표이고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 현장 탐방 |
영어몰입교육 3년째 청원초등학교에 가 보니…
사립초등학교는 교육청의 교육정책에 따른 방향 설정이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사립초등학교에서의 영어교육이 더욱 활발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영어역점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서울 청원초등학교의 교육 현장을 찾았다.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것이 우리 학교의 목표입니다. 영어를 맹종하는 사대주의가 아니라 영어를 도구로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힘을 보여주는 인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이 같은 교육철학을 주창하는 청원초등학교는 56년 전 개교했으며 풍인초등학교에서 교명을 바꾸고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노원구 상계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3년 전부터 영어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과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영어몰입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이곳. 영어교육에 대한 취약점과 모순점을 보완해 현재는 주당 13시간씩 집중적으로 영어 수업을 한다. 기본적으로는 정부의 교육과정을 따르면서 ‘차일드 유 Child U’라는 미국의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병행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총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1, 2단계에서는 언어, 수학, 과학 교육을 진행하고 3단계에서는 테마 프로젝트를 더한다. 입학생 중 어학원 출신 학생이 60%, 유치원 출신 학생이 40% 정도를 차지한다는데 이들을 같이 호흡시키는 것이 청원초등학교의 고민이다. 그래서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입학 전(2월)에 예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학기 초에는 영어 등급을 A, B, C, D 네 개 등급으로 나누어 수준별 이동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A등급에 속한 학생들은 원어민 교사들이 모국의 어린이들보다 우수하다고 칭찬할 정도라고 한다.
‘ES(English Special) 시간’은 이 학교만의 특별 프로그램으로 영어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아이들은 심화반, 뒤처지는 아이들은 보충반에 배치해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No Child Left Behind’라는 슬로건을 달성하려는 청원초등학교의 또 하나의 노력이라고 한다. 온라인으로 가정에서도 영어교육이 연계되도록 한다. 인터넷을 활용한 듣기 훈련, 발음 교정, 복습 등으로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영어 환경에 노출시킨다.
청원초등학교는 ‘영어는 학습보다 습득이다’라는 철학에 따라 원어민 교사를 보조교사가 아닌 담임교사로도 채용해 영어 수업을 맡기고 있다. 수업 외 시간,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시간에도 교사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 출신의 원어민 교사 9명이 있으며, 원어민 담임제를 시행하고 있다. 영어교감이라는 낯선 직책도 있다. 영어교감은 교사 채용, 교재 선정, 커리큘럼 운영 방안 등 영어교육 전체를 총괄한다. 이외에도 방학 중에 3주 과정으로 영어 캠프를 운영하고, 매 학기 수유영어마을에서 체험학습을 한다. 영어 경시대회, 영어 말하기 발표회 등의 행사들도 진행하고 있다.
영어 외에 특기교육도 청원초등학교의 역점 대상이다.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첼로 같은 양악기를 비롯해 가야금, 해금 등 국악기도 선택해 배울 수 있다. 또 생활체육, 컴퓨터, 어학, 미술 분야의 수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전문 강사들을 초빙해 수업을 맡긴다. 청원오케스트라와 사물놀이부는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학교의 자랑거리다.
원어민 교사 엠마(Emma)
Q. 청원초등학교의 영어교사가 된 계기는 ?
A. 뉴질랜드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고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죠. 그러던 차에 한국에 오게 되었고 청원초등학교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Q. 뉴질랜드와 한국의 교육과정을 비교한다면 ?
A. 뉴질랜드와 미국의 교육과정은 유사한 편입니다. 한국의 교육과정이 더 정교한 것 같습니다.
Q.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A. 과목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본인 스스로 영어에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니까요.
청원초등학생 김나영(1-1반)
Q. 청원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따로 영어를 배운 적이 있나요?
A. 유치원 다닐 때 영어학원도 다녔어요. 과학은 비슷한데 수학은 그때 배운 거랑 달라요.
Q. 매일 영어로 수업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나요?
A. 힘들지 않아요. 재밌어요.
Q. 영어로 말하는 거, 자신 있어요?
A. 영어가 겁나지 않아요. 집에서 복습하니까 기억에 오래 남아요.
/ 여성조선
취재 장세영 기자 | 사진 신승희·박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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