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가 ‘새와 생명의 터’ 대표 나일 무어스
“한국 철새에 반해 20년 이 땅이 내가 있어야 할 곳”
- 1990년 10월 어느 날, 낙동강 을숙도. 붉게 물든 석양을 배경으로 헤아릴 수 없는 철새들이 날아올랐다. 힘찬 날갯짓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갈대밭 저쪽, 30대 중반 외국인 사내가 새들의 몸짓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incredible). 이 광활한 연안 습지와 헤아릴 수 없는 새들…. 여기, 이 땅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새와 생명의 터(www.birdskorea.or.kr)’ 대표를 맡고 있는 조류전문가 나일 무어스(Moores·45)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고 했다. 새만금, 아산만, 영종도, 강화도, 순천만 등 습지와 새가 서식하는 곳을 찾아 전국을 누빈 게 내년이면 20년을 맞는다. 철새의 이동경로를 관찰하고 기록하기 위해 어청도·소청도 등 황해의 섬을 찾은 것도 수십 차례다. 한반도의 구석구석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주남저수지
경남 창원시 동읍에 위치하며 면적은 597만㎡. 보통 주남·동판·산남저수지를 통틀어 주남저수지라 부른다. 가창오리·재두루미·노랑부리저어새 등 20여종의 천연기념물과 환경부 멸종위기종 50여종을 포함, 150여종의 다양한 철새가 서식하고 있으며 가시연과 어리연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불린다. 홈페이지는 junam.changwon.go.kr, 생태학습관 연락처는 055-212-4950이다.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 동안 ‘제2회 주남저수지 철새축제’가 열린다. 남해고속도로 동창원 IC에서 창원방면 14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 ▲ 탐조용 망원경으로 주남저수지의 철새를 관찰하는 나일 무어스 대표.
- 창원에서 열리는 제10회 람사르 총회를 보름여 앞둔 지난 10월 13일 무어스 대표를 만났다. 약속 시간은 오전 10시30분. 짙은 회색빛 셔츠와 낡은 검정색 바지 차림에, 목에 라이카 쌍안경을 걸고 어깨에 필드스코프(field scope·탐조용 망원경)를 둘러멘 무어스 대표는 벌써 부산 남천동 집 앞에 나와 있었다. 남해고속도로를 지나 국내 최대의 철새 보금자리 중 하나로 꼽히는 주남저수지로 향하는 동안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새와 습지, 환경보전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우리 주위에 새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은 하나의 생태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아요. 새의 서식지를 보전하는 게 인간의 삶터를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죠. 새는 인간을 포함한 환경의 바이오 인디케이터(bio-indicator)예요.”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국경 없는 그곳엔 하나의 세계만 존재”
오전 11시30분 주남저수지에 도착했다. 저수지 진입로는 아스팔트로 깨끗이 포장됐고, 전시관 등 주변 시설도 손님맞이 마무리 단장을 하고 있었다. “1991년 조류학자 원병오 교수님과 처음 왔는데 그 뒤로 백 번도 넘게 들락날락했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진입로가 없었고 탐방로도 좁다란 논길이었죠. 우리는 불편했지만 새들에겐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었을 텐데, 지금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새와 인간의 공존을 바란다고 하면서 인간의 입장만 내세운 결과가 아닐까요?”
멀리 저수지 안쪽, 반짝이는 수면 위에 수십 마리의 잿빛 오리떼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자, 이제부터는 조용히! 이곳은 새의 영토예요. 조금이라도 ‘주인’이 놀라게 하면 안 돼요.”
간간이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무어스 대표는 발걸음을 멈추고 집중했다. “왓 어 뷰티풀 사운드(What a beautiful sound)! 리슨(listen).” 그는 자신이 식별할 수 있는 조류의 울음소리가 무려 1000여가지에 달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꽥꽥’ 소리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다 달라요. 지금 들리는 소리는 다 자란 암컷 개리의 것이고, 이번 것은 아직 덜 큰 기러기의 것인데…. 소리만 들어도 편안한지 즐거운지 불안한지 짐작할 수 있어요.” 150여m 정도 멀찍이 떨어진 저수지 가운데 한 무리의 새가 작은 점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저건 흰뺨검둥오리고, 하얀 녀석은 중대백로예요.” 60배 배율의 필드스코프를 들여다보자 생생한 몸짓이 눈에 확 들어왔다.
건너편에서 새를 관찰하던 한 주부가 무어스 대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2년 전 그에게 탐조 강의를 들었다는 강혜숙(45·창원시 본곡동)씨다. 그는 “무어스 대표를 통해 새를 대하는 예의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처럼 새를 만날 때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젠 알겠어요.”
무어스 대표가 시간을 쪼개 쓰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탐조 교육 활동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영국 리버풀 북쪽 사우스포트가 제 고향입니다. 명문 축구단 리버풀의 데이비드 무어스 명예회장이 사촌형님뻘 되지요. 워낙 새가 많은 고장이라 들판과 강변을 누비며 새를 관찰하는 게 자연스럽게 취미가 됐어요.”
- ▲ 습지 생태가이드인 이미영(오른쪽)·서정희씨에게 탐조방법을 설명하는 무어스 대표.
- 고교에서 연극 교사로 활동하던 무어스 대표는 문화의 다양성에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그 무렵 우연히 구한 조류도감에서 넓적부리도요의 그림을 발견했다. “고향에서 늘 보아왔던 그 새가 일본에도 있다니!”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과 넓적부리도요를 직접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일본땅을 밟았다. 후쿠오카 인근에서 강사로 생활하며 철새 서식지인 습지보전운동에 뛰어들었고, 규슈대학에서 생태설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으며 전문성을 키웠다.
한국에 오게 된 이유를 묻자 그는 “나는 럭키가이(lucky guy)”라고 말했다. 비자 갱신 문제 때문에 우연히 한국, 그것도 후쿠오카에서 가까운 부산을 찾았다가 낙동강 습지의 장관을 만나 “감동을 먹었다”는 것. 주저 없이 한국행을 결심했고, 1998년 전국 조류 조사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부산에서 남해, 순천만에서 해남, 금강 하구를 거쳐 다시 서천, 서산, 그리고 아산만, 인천과 서울…. 새를 따라, 새를 찾아 전국을 누비는 생활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새 이름 외우기보다 새소리 가슴으로 들었으면
한국인의 엄청난 교육비를 지구 지키는 데도 나눠주길”
무어스 대표의 탐조 철학은 무엇일까. 그는 “새의 이름과 특성을 기록하고 외우게 하는 대신 오감을 이용해 새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30여명의 학생과 함께 한 1박2일짜리 ‘어린이 람사르 총회 주남 영어캠프’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깃털을 다듬는 자잘한 새의 몸짓, ‘휘티~티’ ‘호루루루~’ 지저귀는 소리를 접하며 무엇이 가슴에 와닿는지 느끼는 게 중요해요. 그런 경험과 관심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인간의 눈이 아니라 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하늘 저 높이에서 보면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세상은 그저 하나일 뿐이에요.”
그는 “자식 교육비로 들이는 그 엄청난 돈과 시간, 열정(passion)을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지키는 데 조금이라도 투자할 수는 없는가” 하며 안타까워했다. “교실과 학원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가르침의 전부인가요? 새들의 서식지를 지키는 것이 결국 우리가 마시기 좋은 물, 맑은 공기를 지켜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무어스 대표는 “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여기 탐방로부터 볼까요? 사람 서너 명이 손을 잡고 걸어가도 넉넉할 정도의 길. 시멘트로 깨끗이 닦아놓았죠. 하늘에서 새의 시각으로 보면, 이건 너무나 눈에 확 뜨이는 ‘인간의’ 구조물이에요. 좁다란 오솔길은 왜 안 되나요? 몸을 가리고 새를 관찰하는 은폐형 탐조대(bird watching hide)가 있어야 해요.”
‘자전거족(族)’ 몇 사람이 탐방로를 스쳐 지났다. 라디오를 볼륨을 높인 채 페달을 밟고 있었다. 무어스 대표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울긋불긋한 복장에 노란색 헬멧. 새들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어그레시브(aggressive)한 모습인가요. 거기에 라디오 소음이라니. 여긴 새들의 휴식처이지 하이킹 장소가 아니잖아요? 존중(respect)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는 것이죠.” 그는 저수지 입구에 설치된 자전거 대여소도 못마땅한 눈치였다. 무어스 대표는 습지를 제대로 관리하고, 주변의 농민 피해도 막으려면 장기적으로는 일정한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 지난 8월 23~24일 열린 어린이 람사르 총회 주남 영어캠프. / photo 새와 생명의 터
- 그가 이끄는 ‘새와 생명의 터’는 호주·뉴질랜드 도요·물떼새 연구단(AWSG·Australasian Wader Studies Group)과 함께 ‘새만금 도요·물떼새 모니터링 프로그램(SSMP)’을 진행하고 있다. 새만금 매립으로 인한 습지 파괴가 도요·물떼새 개체군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 면밀히 검토하려는 것으로 2006년 봄에 시작해 3년째를 맞았다. 조사 결과를 보면, 2006년 5월 초·중순 새만금에는 17만6955마리의 도요·물떼새가 서식했는데 올해 같은 기간에는 겨우 3만9577마리만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월 벌인 전국 규모의 조사에서는 붉은어깨도요새와 민물도요새 등 도요·물떼새가 모두 29만여마리로 기록됐는데 이 수는 1997·2003년 측정된 63만5000여마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결과를 이번 람사르 총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무조건 개발 반대가 아닌 ‘악(bad)개발’에 반대
이슈 찾아 옮겨 다니는 환경 정치꾼들엔 넌더리”
“얼마나 심각한 환경 피해가 나타났는가를 추상적인 형용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데이터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정부건 누구건 설득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는 ‘새와 생명의 터’ 활동을 결정짓는 철학의 밑바닥에 ‘보전(conservation)’이란 단어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존(preservation)이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보전은 ‘생태계를 이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자연자원의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이용에 중점을 둔다’는 데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개발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악(bad) 개발에 대해 철저히 반대합니다.”
그는 일부 환경단체에서 보이는 무조건적인 저항 시위 움직임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지금 한국의 환경운동에서 보다 필요한 것은 막연한 분노보다는 정확한 데이터이고, 반대보다는 교육 활동이며, 저항 시위보다는 대안이나 정책 제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성도 없이 한데 몰려다니며 이슈에서 이슈로 날아다니는(flying from issue to issue) 환경 정치꾼들, 이건 정말 난센스예요.”
이번 람사르 총회의 구호는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healthy wetlands, healthy people)’다. 무어스 대표는 이 구호가 현실이 되는 날을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 창원 =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사진 =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