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 더 이상 이렇게 배울 순 없다
Bilingual Korea를 위한 제안
2008년 12월 8일 발행된 주간조선 2033호의 커버스토리로 나온 더듬이의 기획 기사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과 6살 유치원생 두 아들을 둔 아비로서, 부럽고 답답하고 화도 나곤 했던 취재 과정이었습니다.
성문 기초영문법과 기본영어, 종합영어 등 녹색 표지 시리즈를 기본서로, 맨투맨 시리즈 기본/종합을 참고서로 삼아 학창시절 적잖은 시간을 영어에 투자했지만 신통치 않은 결과로 끝난 제 영어 실력 때문에 그랬습니다. 원어민을 만날 때 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울렁증 비슷한 것을 두 아들에겐 물려주지 않으려 어릴 적부터 영어 유치원도 보내보고 그랬지만, 효과성에 대해선 저 역시 반신반의 했지요. 아내나 저나 모두 학부 때 언어학을 전공했지만, 뾰족한 해답은 얻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전문가 선생님들을 만나 뵙고, 심야 강의를 들어가면서 취재를 마치고 나니 어렴풋한 해답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이중언어 교육을 놓고 얼핏 보기엔 찬성-반대론으로 첨예하게 입장이 갈린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방법론 상의 차이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중언어 교육, 바이링구얼, 영어 공용화 등 서로 조금씩 다른 개념을 섞어 사용하며, 거기에 논리보다는 감정을 섞어 엇갈린 논의만 계속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어떻게'에 대해 좀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독자들에게 혼란 덩어리 하나를 더한 것은 아니길 바래봅니다.
I. Bilingual 교육 현장
지구촌 언어(global language). 영어가 특정 국가의 언어가 아닌,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의사소통 수단(communication tool)이라는 데 이의는 없다. 세계 각국의 영어 사용자들이 영미인에게 “영어는 당신들만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사소통 수단(English is not your own language, it’s our communication tool)”이라고 외치는 시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 국민의 영어 사교육비의 규모를 최소 15조원대로 추산했다.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밑바닥 영어 실력 때문에 평생 시달린 부모 세대가 자식에게는 ‘영어의 질곡’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벌이는 눈물겨운 투자인 셈이다.
나라 전체가 늘 영어 공부의 광풍(狂風)에 휩싸였지만, 우리의 영어 실력은 바닥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영국문화원과 케임브리지대가 주관하는 영어인증시험 IELTS는 작년 응시자 수 상위 20개국의 성적을 분석한 결과, 한국이 이민·직업연수용 시험에서 19위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기업체에서도 제대로 된 영어 사용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말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이중언어자(bilingual)를 길러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과연 요원한 일일까. 교육 전문가들은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진행되는 현재의 영어 수업을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몰입식 영어교육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곳곳에서 진행되는 이중언어 교육현장을 들여다봤다.
‘영어 몰입교육 1번지’로 꼽히는 영훈초등학교 4학년 3반 수업 모습.
사진 출처 =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1. ‘몰입교육 1번지’ 영훈초등학교
한 반을 두 팀으로 나눠 한국인·원어민 교사가 번갈아 수업
매주 15시간, 졸업까지 3600시간 원어민과의 회화에 집중 노출
11월 24일 서울 강북구 미아5동 영훈초등학교를 찾았다. 우리나라 영어 몰입교육(English immersion education)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다. 1997년 시작했으니 벌써 10년이 넘었다. 회색 카펫이 깔린 교실에는 칸막이가 따로 없다. 복도와 베란다까지 확 트여 있었다. 교실 바닥에 둘러앉거나,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댄 아이들. 수업 분위기는 자유로웠지만 그 속을 관통하는 규율이 느껴졌다. 교실과 복도 벽에는 학생들의 ‘작품’이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인체의 골격을 그리고 해당 단어를 적어놓은 워크시트(work sheet), 짧은 에세이, 동전과 지도로 꾸민 영국의 금융제도 프레젠테이션 자료, 수류탄 투척기(grenade launcher)·팔에 차고 다니는 컴퓨터(arm computer) 등 미래에 발명하고 싶은 물건에 대한 설명서…. 학생들의 녹록지 않은 영어 실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알록달록 장식된 ‘Knowledge is Brain Food’ ‘Experiences are building blocks for your future’ 같은 표어가 눈길을 끌었다.
1학년 4반의 읽기 수업 시간. 부(副)담임 샬럿 손드(Saund) 선생님을 중심으로 어린이들이 모여 앉아 동화책 ‘잭과 콩나무(Jack and the Beanstalk)’를 번갈아 읽고 있었다. 화이트 보드에는 ‘character:Jack·mother·cow·orge·old lady’ ‘Setting·when: daytime and night time’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선생님이 “What happened at the beginning(처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니)?” 하고 묻자 아이들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Jack sold the cow to an old woman for some magic beans(잭이 마법콩을 사려고 어떤 할머니한테 소를 팔았어요).” 똑 떨어지는 대답을 한 친구들에겐 선생님이 예쁜 별 모양 스티커를 손등에 붙여줬다.
6학년 3반의 수학 시간. 앰버 더피(Duffy) 선생님과 학생들이 마력(馬力·horse power)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Lazy R Horse Ranch’ 단원의 마지막 부분. 무게를 재는 방법을 놓고 강민정·김준희 두 친구가 선생님에게 이런저런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연필로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때론 원어민 교사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 이중언어자의 그것이다.
1학년 때부터 원어민 영어 교사들과 함께 생활한 학생들이 구사하는 영어 수준은 초등학교 고학년생의 경우, 일반 고교 2~3학년 학생을 넘어설 정도다. 작은 모둠으로 교사와 학생이 일일이 눈을 맞춰가며(eye contact)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영어 울렁증’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창진 교장은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이면 영미권 학교로 바로 진학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수준이 된다”고 말했다.
영훈초등학교의 1개 학년은 4개 반으로 이뤄져 있다. 한 학급의 학생은 36명이지만 A·B반으로 나뉘어 18명씩 수업을 받는다. A반이 한국어 담임 교사가 진행하는 수업을 받는 동안, B반은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에 참여하는 식이다. 몰입교육 디렉터(IP Director) 아래 각 반의 부담임 교사 등 32명의 원어민 교사들이 활동한다. 수업 시간은 80분. 다른 학교보다 두 배 정도 길다. 중간에 10분의 휴식 시간이 있다. 보통 공립초등학교의 수업시간은 주당 25~32시간 정도인데, 영훈초등학교 학생들은 원어민 교사의 수업 15시간을 포함, 38시간 정도를 소화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주당 ‘랭귀지 아트(language art)’ 9~10시간, 수학(math)·과학(science) 각 2시간, 사회(social studies) 1~2시간이다. 1년에 40주 수업을 받는다고 하면 한 해 600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원어민의 영어에 노출되는 셈이다. 졸업 무렵이면 3600시간에 달한다.
영훈초등학교는 미국·영국·호주·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 학생들이 보는 교재를 사용한다. 이중언어 교육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우리 교과서를 영어로 번역해 만든 교재를 사용했는데, 원어민 교사들이 가르치는 데 한계가 나타나 지금의 방식으로 바꿨다고 했다. ‘영어 리소스 센터(English Resource Center)’는 영훈초등학교의 지식 창고다. 원어민 교사들은 1만5000여종의 학습자료를 갖춘 이곳의 자료로 다양한 보조교재를 만들어 수업시간에 활용하고 있었다.
한국어 담임 교사와 원어민 교사의 수업이 꼭 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심옥령 교감은 “전체적으로 다루는 콘텐츠는 비슷하지만 한국인·원어민 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이나 접근 방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면서 “언어 자체를 학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어민 교사를 통해 그들의 문화와 생각의 방식을 배우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처음 입학했을 때 학생들의 수준은 천차만별. 그래서 초기엔 쉽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학교는 영어 학습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잉글리시 리딩 스페셜 케어(English reading special care)’다. 전문 교사가 따로 배치돼 2~3학년 어린이 중 읽기에 어려움이 있는 어린이들을 일주일에 5시간 정도 개별 지도한다. 정창진 교장은 “내년 1학기부터는 4~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2.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
교육·체험·놀이 결합… 외국 같은 환경 만들어 영어 두려움 없애
주중·주말반 등 단기 코스와 4주 일정의 방학 집중프로그램 마련
경기영어마을(english-village.gg.go.kr)은 교육(education)·체험(experience)·놀이(entertainment)의 ‘3E’를 결합, 외국과 유사한 환경에서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생활을 체험하는 기회를 마련하겠다며 경기도가 야심차게 추진한 사업이다. 지난 11월 20일 파주시 탄현면의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를 찾았다. 2006년 4월 문을 연 파주캠프에는 그동안 5만7000여명이 주중반·주말반·방학집중반 등 정규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일일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한 사람까지 합하면 50만명을 훌쩍 넘는다. 강사진은 원어민 강사 90명을 포함, 140여명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 직원이 영어마을 여권(passport)을 건네줬다. 안내 지도에는 ‘Only English, No Korean’이라 적혀 있었다. 캐릭터 숍, 서점, 콘서트 홀, 체험 교육관 어디를 찾아도 내·외국인 강사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옥스퍼드 거리에 있는 교육 강의동에서는 용인시 구성중 2학년 학생들의 주중반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주중반 프로그램은 월요일 9시30분에 입소해 금요일 오후 1시30분에 퇴소하는 4박5일 코스로, 한 반은 15명 안팎이다. 원어민 교사와 한국인 강사 각각 1명이 담당한다. 광고제작·미술·요리·창작·발명·음악·여행 등 8개의 공통 과목(core subject)과 방송제작·연극·영화제작·로봇공작·신문기사 중 1개를 선택하는 과제수행 과정을 거친다. “If you were a millionaire, what would you do(만약 백만장자라면 무엇을 하겠어요)?” “Buy an airplane(비행기를 살 거예요)!” 열정적인 원어민 교사들의 몸짓과 목소리에 학생들이 슬슬 반응하기 시작했다. 강의실 한쪽에선 최혜윤 강사가 학생들과 영어로 끝말잇기(word chain) 게임을 하고 있었다. “triangle… elephant… train….” 토·일요일을 활용해 가족 단위로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 사진 출처 = 조선일보
12월 2일부터 선착순 등록을 시작하는 겨울방학 집중반은 12월 29일에 시작해 내년 1월 22일까지 4주, 24박25일 동안 진행된다. 대상자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500여명. 작년에는 10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장원재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은 “해외 어학연수만큼의 효과를 보기는 어렵겠지만, 학생들이 원어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몰입교육 체험을 통해 영어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강하게 되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영어를 매개로 이뤄지는 치열한 국제관계 속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고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유창한 영어 사용자가 돼야 합니다. 영어를 미국언어와 동일시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인식하고 영어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하자는 겁니다. ‘고비용 저효율’ 시설이라는 영어마을 비판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생생하고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3. 글로벌 경영 나선 대기업들
LG전자 ‘영어 공용화 원년’ 선포… 회의·보고서 모두 영어
SK텔레콤은 시범운영하던 Bilingual 프로그램 본격 도입
글로벌화의 가속화에 따라 기업체의 이중언어 교육도 활기를 띠고 있다. 2008년을 ‘영어 공용화의 원년(元年)’으로 선포한 LG전자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LG전자는 작년부터 사내 영어 공용화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작년 연초 남용 부회장이 국내외 임원·법인장·지사장 등 350여명이 모인 회의석상에서 영어로 연설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한국 본사를 비롯, 해외 100여곳의 법인·지사의 공용어를 영어로 정착시키기 위해 영어센터(ECC·English Communication Center)를 만들었고, 실전을 방불케하는 전화 영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앞서 2005년 사내 인트라넷인 LGEP(LG Enterprise Portal)의 영문화를 시행했기 때문에 업무 시스템에는 한글이 사라졌다. 부서에 관련 없이 각종 회의 자료와 보고서를 작성할 때 원칙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도록 돼 있다. ‘팀’에서 매주 만드는 주간 계획도 당연히 영어로 작성된다. 경영 회의도 영어로 이뤄지고, 회의에 사용되는 보고 자료와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발표 자료도 모두 영어로 만들어진다. LG전자 관계자는 “영어 공용화를 통해 글로벌 경영의 속도를 높이고 해외 현지 법인과 한국 본사 사이의 의사전달의 정확도를 함께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은 얼마전 사내 임직원들에게 “전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함께 일하면서 성과를 창출하는 기업을 만들겠다. 이를 위해 사람과 시스템, 문화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은 지난 3월 10일, 작년부터 시범적으로 운영되던 바이링구얼(bilingual)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영어 프레젠테이션과 영어 회의가 진행되는 팀은 현재 77개 팀으로 회사 전체의 30% 수준. 사내의 영어 능통자를 바이링구얼 촉진자(facilitator)로 활용해 사내 영어 사용능력 향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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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어교육(bilingual education) 학습자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 두 가지 언어에 통달하게 된 사람을 이중언어자(bilingual)라고 부른다.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경우는 다중언어자(multilingual)가 된다. 이중언어능력이란 말은 포괄적 개념이다. 제2 언어를 원어민만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수준부터 최소한의 읽고 쓰는 이해 능력만 가진 경우까지 이중언어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론자(maximalist)는 두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을 때만 이중언어능력을 인정하지만, 최소론자(minimalist)는 제2 언어에 대해 최소한의 구사 능력만 있어도 인정한다. 말하기·듣기·쓰기·읽기를 다 하되 아직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이뤄지면 이중언어자로 보는 것이다.
ESL과 EFL 제2 언어로서의 영어(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와 외국어로서의 영어(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생활 언어’로 보느냐 아니면 ‘국제적 교류와 대화에 필요한 도구로 보느냐’에 있다. 태어날 때부터 복수 언어환경에 처한 경우에는 모국어가 아닌 또 다른 언어가 모국어만큼 능통해야 하며, 그때의 목표 언어교육은 제2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된다. 단일언어 환경에서 태어나 줄곧 다른 언어 없이도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지만 세계화·국제화 시대에 개인이나 단체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뤄지는 언어교육이라면 외국어를 가르친다고 보면 된다.
몰입교육(immersion program) 일정 기간 목표 언어(제2 언어)에 집중 노출시키는 교육방법. 학교 교육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2 언어로 가르치는 방식이다. 몰입교육의 내용은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따르며, 부분적 몰입은 일부 교과목을, 전체적 몰입은 모든 교과목을 제2 언어로 수업한다. 프로그램시작 1~2년간은 모든 수업을 제2 언어로 가르치고, 이후로는 제1 언어의 비율을 점차 높여 간다. 하지만 전체 수업 시간 가운데 제2 언어를 통한 수업 비율이 50%가 넘어야 한다.
II. 외국선 어떻게 하나
박준언 숭실대 영문과 교수
오늘날 세계적으로 영어 교육 정책의 방향은 기존의 단순 외국어로서의 영어(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교육에서 탈피해 국제 통용어로서의 영어(English as an international/global language) 교육으로 바뀌고 있다. 영어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은 영어를 학교 수업에서 타 과목들과 분리된 독립 교과로 가르치지 말고 부분적으로라도 교과목 내용과 통합해서 가르칠 것을 요구한다. 영어를 영국·미국 등 전통적 영어 사용 국가들만의 언어가 아닌 전 세계인의 공유어로 인식하고 보다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영어를 교과목 내용과 통합하는 교육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 캐나다
프랑스어도 국가 공식언어… 1965년부터 몰입교육
모국어만 공부한 학생에 학업성취도 뒤지지 않아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국가 공식언어(official
2. 싱가포르
영어가 제1언어… 유치원 때부터 강도 높은 몰입교육
학생 실력에 따라 영어·민족어 학습 수준은 다르게
싱가포르는 중국·말레이·인도계 등으로 구성된 다인종 국가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뒤 강력한 영어 교육정책을 실시해 영어가 국가의 제1언어(first language)로 사용되고 있다. 유치원 단계의 어린 아동들부터 영어를 수업의 매체 언어로 사용해 강도 높게 영어 사용에 노출시키는 조기 몰입교육을 실시해 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초등교육 과정에서는 4학년 때 영어·제2언어·수학 시험을 국가적으로 실시해 그 결과에 따라 학생을 네 집단으로 구분하여 교육하고 있는데, 이 중 상위 세 집단에 영어를 학습 교과목 내용에 포함해서 가르친다. 중등교육 과정에서는 학생들의 언어와 학습 능력에 따라 세 집단으로 구분해 상위 10% 수준의 학생들에게는 영어와 학생의 민족어를 제1언어 수준으로 학습시키고 아래 단계의 45% 학생들에게는 영어를 제1언어, 학생의 민족어를 제2언어로 학습시키고 있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인종 간 의사소통과 각 인종의 문화유산을 보전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이중·다중언어 사용 정책을 추구해오고 있다. 다인종 사회의 유기적 통합, 해외자본, 기술 및 우수인력 유치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수단으로 영어를 국가 제1언어로 채택하고 있다.
3. 핀란드
핀란드어·스웨덴어 중 선택… 영어는 제1외국어
일반 과목도 영어로 가르치는 일종의 몰입교육
핀란드는 핀란드어 사용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일부는 스웨덴어 사용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 사용 환경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핀란드어와 스웨덴어 중 하나를 선택해 학교 수업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 두 언어 이외에도 영어를 가장 중요한 외국어로 지정, 어린 나이부터 학습의 매체 언어로 가르침으로써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영어사용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핀란드 영어교육의 목표는 영어 사용기술(skills), 영어 지식(knowledge), 영어 사용권 문화에 대한 긍정적 태도(attitude), 영어를 사용한 학습요령(learning-to-learn skills) 함양의 4가지로 구성돼 있는데 지난 10여년간 영어를 다른 교과목과 분리된 독립 과목으로 교육하지 않고 학습 내용과 영어를 통합해 가르치는 소위 언어·학습 통합교육(CLIL·content & language integrated learning)을 실시하고 있다. 즉 일종의 몰입식 교육을 통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4. 말레이시아
1957년 독립 후엔 영어 배척… 2003년부터 몰입교육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교사연수 실시, 단기간에 성과
오랜 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말레이시아는 1957년 독립하며 영어를 언어 유산으로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독립 초기 강력한 모국어 교육 강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영어 사용을 배척한 결과,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영어 사용 인프라가 상당 부분 와해됐다. 마하티르 전 총리 재임 시절 선진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국민의 영어 사용 능력을 높이는 것이 필수적임을 다시 인식하게 됐고, 2003년부터 연차적으로 모든 초·중등학교의 과학과 수학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몰입식 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다. 단기간에 수학·과학 과목의 영어 몰입교육 실시가 가능했던 이유는 몰입교육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체계적이고 강도 높게 실시해 영어 원어민 화자 교사가 아닌 말레이시아 교사들이 영어를 사용해서 이들 과목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반세기 이상 유지해 온 EFL적 시각의 영어 교육 정책을 탈피하고 부분적이나마 이중언어 교육의 방향으로 영어 교육 정책을 전환할 시점에 와 있다. 교과목 내용 학습과 유리된 학교 영어 교육만으로는 학생들의 영어 사용능력 제고에 절대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사례로 제시된 국가들처럼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영어 교육 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이중언어 사용 능력은 국가·사회적 자산이다. 학교 밖에서도 영어가 사용될 수 있도록 영어 사용 환경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III. 어떻게 하면 될까: bilingual 교육 5가지 Key Point
이중언어 교육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모색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제도 도입 여부에 대한 찬반 대립에 치우쳐 어떤 테마를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에 대해 심도 있게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중언어 교육을 실시할 경우 △영어 교육의 목표 △이상적인 수업 시간과 방법 △양질의 교사 수급·관리 △교재 △영어 학습 환경 조성 등 5가지 주제에 대해 숭실대 영어영문학과 박준언 교수, 한국외대 영어학과 이성하 교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의갑 연구기획부장이 도움말을 줬다.
1. 교육 목표
원어민 같은 유창한 발음보다 의사소통 능력 키우도록
키신저 전 美 국무장관도 독일식 악센트로 국제무대 누벼
영미 원어민 화자와 같은 수준의 영어 사용자를 길러내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는 달성할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 영어 교육의 목표를 원어민 화자와 같은 수준의 영어사용 능력 함양에서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인 현실적인 것으로 낮춰야 한다. 유창한 영어 발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영어를 사용해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두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전혀 불편함이 없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 때(feel comfortable)’ 이중언어자라 할 수 있다. 균형 있는 이중언어자(balanced bilingual)가 되는 것이다.
원어민과 같은 자연스러운 영어 발음은 이중언어 교육의 핵심이 아니다. 유창한 영미식 영어 발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고 영어로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한다. 특유의 독일식 악센트를 구사하면서도 거침없는 영어로 국제 외교무대를 누볐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거침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히딩크 전 국가대표 축구 감독이 그런 사례다.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영어 발음은 완전히 우리나라 ‘토종’이다.
일리노이대 석좌교수인 카치루(Kachru) 박사는 영어 사용국가를 세 집단으로 분류했다. 영국·미국·캐나다·호주 등 전통적 영어 사용국인 내부집단(inner circle), 인도·필리핀·케냐·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한때 영미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영어를 모국어와 함께 사용하는 국가인 외부집단(outer circle), 영어를 외국어로 지정해 공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대부분의 나라인 확장집단(expanding circle)이 그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각종 국제무대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내부집단 영어 원어민보다 외부집단이나 확장집단에 속하는 영어 사용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영어 원어민 화자의 개념을 영미인 위주의 원어민 화자에서 벗어나 외부집단의 영어 사용자까지 포함하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교육 당국도 영미인 중심의 영어 화자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2. 수업시간과 방법
초중고 총 2500시간은 돼야… 캐나다는 최대 8000시간
기초 영어능력 닦아주는 준비 프로그램도 마련해야
외국어 학습의 성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언어 입력, 노출의 양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현재 우리 초등학생들은 3학년부터 주당 1~2시간씩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받는다. 주당 2시간씩 1년에 35주 수업을 한다고 하면 총 영어학습 시간은 70시간에 불과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배운다고 해도 300시간을 넘지 못한다. 중·고교에서는 주당 4~5시간이 고작이다. 이렇게 적은 양의 영어 입력을 제공하면서 학생들의 영어 사용능력 부족을 탓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고교 과정까지 2400~2500시간은 돼야 기본적인, 중간 수준의 영어를 사용하는 화자를 만들 수 있다. 현재의 영어 교육과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몰입식 교육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보통 5000시간 정도를 배워야 몰입식 교육을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캐나다에서는 6000~8000시간 정도를 교육받는다.
몰입식 교육에 대해 자주 나오는 오해 중 하나는 한국어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몰입교육의 최종 목표는 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중언어자(bilingual)를 만드는 것이다. 캐나다 몰입교육에서는 공교육 1년차 과정부터 목표 언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데, 3학년 무렵 과목 비율을 나누게 된다. 중학교 무렵에서는 두 언어가 나란히, 동시에 쓰이는 것이다. 몰입식 교육에서는 학생들의 기초 영어 사용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과정인 브리지 프로그램(bridge program)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 단순히 1~2년 동안의 수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학제로 연결될 수 있는 연계성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다. 몰입식 교육을 마치고 원 소속 학교로 돌아갈 경우, 교과 과정의 연계문제도 해결돼야 한다.
영어마을(English Village)은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효용성에 한계가 있다. 보다 내실있는 운영이 필요하다. 대부분 학생 1명에게 한 번 정도의 이용 기회가 주어지는데, 체험 기회를 확대한다면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10년(초등 3~고 3)의 학교 영어교육 기간 동안 80시간씩 10차례 정도 영어마을에 입소한다면 800시간 정도 영어에 집중적으로 노출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양적으로만 따져도 현 학교 영어교육의 전체 시간과 맞먹는다.
3. 교사 수급
원어민 교사는 과도기 조치… 우리 교사 교육에 집중을
사대·교대는 무조건 영어몰입 강의… 해외연수도 확대
바람직한 이중언어 교사는 우리말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 영어교사다. 영어 원어민 교사의 영입은 일종의 과도기적 조치다. 우리 영어 교육의 핵심적 주체는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 중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현직 영어교사인데, 이들의 영어수업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들이 항상 영어 환경에 노출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영어 몰입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들 학과의 모든 과목을 철저히 영어로만 진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교수들은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고, 학생들에게도 영어로만 생활할 것을 강도 높게 주문해야 한다.
현직 영어 교사들도 지속적인 중장기 영어연수를 통해 능력을 한 차원 높이도록 해야 한다. 이들은 최근 교직에 입문한 교사에 비해 말하기 부분에서 부족한 반면, 읽기와 문법에서 상대적으로 강하다. 이 부분을 특화시켜야 한다.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 자비를 들여 중장기 해외연수를 떠나는 교사들에게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승진 시 이를 반영해주는 점수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공적·사적 영어교육기관에 투입되고 있는 영어 원어민들이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각급 학교에 있는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들은 교과부가 주관이 돼 만든 EPIK (English Program in Korea)를 통해 초청돼 활용되고 있다. 모집과 계약에 너무 치중해 관리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영미 백인의 원어민 화자만을 떠올리는 것도 문제다. 오늘날처럼 영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영미인 위주에서 탈피해 비영어권 원어민 화자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4. 어떤 교재로 가르쳐야 하나
현행 교과서엔 ‘학교 안’에서나 쓸 수 있는 영어뿐
학력 격차 감안해 수준별 교재 만들어 선택케 해야
영어교육이 학교 교실 수업에 국한돼 있고 학교 이외에는 영어를 사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영어 교과서는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다. 표현들이 북 잉글리시(book English)라 불리는 교과서 영어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어로 쓰여진 싱가포르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수학 교과서의 구문을 보자. 우리의 중학교 고학년 수준이다. ‘Basil arranges 10 beads in straight row. There is only one bead. The red bead is placed 6th from the right. If Basil counts from the left, in what position is the red bead?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재 개발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이와 학년을 기준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대신, 별도의 기준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선택적으로 교재를 골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5. '영어 환경'이 중요하다
TV·라디오 영어 프로그램 늘리고 신문도 영어면을
학교가 작은 영어마을… 영어 사용 전용공간도 늘려야
우리 사회를 영어 사용에 친화적인 환경으로 바꿔야 한다. 영어 교육은 학교 영어교사나 사설 영어교육 기관에 맡기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제한적인 우리의 영어 학습 환경을 확장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매체로 TV나 라디오 같은 방송 매체와 일간 신문을 들 수 있다. 국내 일간지들도 한 면 정도는 영어로 기사 전체를 요약하거나 중요한 이슈를 선택해 영어로 기사화하는 식의 한국어·영어 공용 신문을 제작할 필요가 있다.
영어 교육의 문제를 영어마을 같은 외형적인 대규모 시설 건립으로 해결하려는 하드웨어 위주의 접근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회성 체험으로는 안 된다. 특정 장소에 대규모 시설을 건립해 학생들을 원거리에서 불러모아 일시적 영어 체험을 하게 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에서 탈피해 시설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보다 많은 학생들이 상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영어체험 시설을 학교마다 설치할 경우, 영어마을이 목표로 하는 영어 사용환경의 제공이라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에 퍼져 있는 수천 개의 개별 학교들을 작은 영어마을로 만들어보자. 학교의 일정 공간을 영어 사용 전용 공간(English only zone)으로 확보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역적 특성을 가미해도 좋다.
IV. 또 하나의 제안
“초중고 영어거품에 사회손실만 눈덩이 차라리 대학 全과정을 몰입교육으로”
보다 효과적인 영어 교육을 위해 이중언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영어가 모든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주장이다. 영어의 필요성이 지나치게 침소봉대(針小棒大)됐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이병민 교수는 “영어가 글로벌 언어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한 영어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상화된 영어를 깨뜨리고 영어의 거품을 걷어내야 제대로 된 영어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도시 국가나 작은 규모의 나라라면 몰라도 인구 7000만~8000만의 국가가 교육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중언어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2006년 토플 시험방법 변경을 앞두고 원서접수를 위해 장사진을 친 예비 수험생들. 사진 출처 = 조선일보
과연 전 국민이 영어 잘할 필요 있나
수요조사도 안 한 채 필요성 침소봉대
지난 11월 19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이병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우리 사회의 영어 환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이중언어를 말할 때, 해당 언어는 그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쓰여야 합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이중언어 교육이라면 영어를 안 쓰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못한다고 살지 못할까요? 단일어 배경을 가진 우리는 가족과 사회에서 배운 모국어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도 그다지 어려움이 없는 언어 환경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영어가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언어라고 믿습니다. 언어 사용 환경이나 영어에 대한 수요, 필요성을 고려하면 영어 능력은 일부에게만 필요하지만 인구의 대다수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길 바랍니다. 모두 영어에 필요 이상의 가중치를 두고 침소봉대한 결과입니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2007)에 수록된 그의 글(영어교육, 어떤 새로운 옷을 입혀야 하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속칭 기러기 아빠의 출현은 사교육에서 진행되는 영어교육 실험의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필리핀 파출부를 고용하는 것에서부터 영어 원어민들이 가르치는 취학 전 어린이 영어학원, 원정출산을 통한 미국 시민권 취득 및 외국인 학교 입학, 영어권 국가로의 조기유학, 원어민을 통한 전화영어, 방학을 이용한 미국·캐나다·뉴질랜드·필리핀 등에서의 단기 영어 연수….’
이 교수는 국가고시를 비롯 대부분의 인력 선발 시험에서 영어가 도입되고, 일부 대기업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며 승진 심사에서 영어 능력이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인정되는 현실이 바로 영어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삶의 여러 관문에서 중요한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영어에 덧씌워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영어 우상화를 깨뜨려야 합니다. 영어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실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영어 교육의 목표를 정하고 영어의 필요성에 대한 과장된 이데올로기를 심고 있어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용이 투자되고 손실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이 교수는 초등학교 조기 영어교육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면서, 학교 영어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에 노출되는 전체 교육 시간과 집중도(intensity)라고 강조했다.
“현재 초·중·고의 전체 영어교육 시간은 730시간 정도입니다. 대학 입학 전 학생들이 음성 영어(듣기와 말하기)에 노출되는 시간은 200시간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언어를 어느 정도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적어도 2000~3000시간 정도의 집중적인 노출이 필요하지만 우리 학교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겁니다. 그것도 일주일에 조금씩 시간을 나눠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방식(drip feed)’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미국 FSI(Foreign Service Institute)의 예를 들었다. “외교관에게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데 2400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루에 6시간씩, 원어민 강사가 5~6명 정도의 소그룹을 대상으로 1년 내내 집중적으로 교육시킬 때 그렇다는 얘깁니다. 30여명의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1~2시간 가르쳐서몇 년이 지나야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하겠습니까.”
초·중·고 영어수업 합해야 730시간뿐
중요한 건 교육시간 증대와 내용의 충실도
그는 최근 초등학교 1·2학년에 영어 교육을 도입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늘어나는 영어 수업은 30여시간에 불과한데, 하루 8시간씩 진행되는 영어마을 프로그램에서 나흘이면 충분한 교육 시간을 2년 동안 물방울처럼 조금씩 떨어뜨려 주었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는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우리 교육은 초·중·고 교육에만 밀집돼 있다면서 영어교육은 대학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전공에 따라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도 높은 영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4년 동안 영어 몰입식 교육을 하면 확실히 성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영어 관련 학과와 경영학과에서는 학부에서부터,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에서는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쳐도 필요한 영어는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말하기 위주의 교육에 대해서도, 그는 읽기 능력을 바탕으로 영어로 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English electronic literacy)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몇 마디 생활영어를 할 줄 아는 것보다 영어로 된 정보를 다루는 능력을
대학에서 제대로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기 영어교육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영어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주장으로 the earlier, the better로 요약된다)’은 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결정적 시기 가설에 대한 논문은 하나같이 미국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몇 살에 영어권 국가에 왔는가(age of arrival)가 변수죠. 코끼리 비스킷만큼 영어에 노출시키는 우리의 영어 환경에서 언제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8세와 10세에 같은 시간 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시켰을 때 누가 잘 배웠을까요.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에서 나온 논문은 10세가 8세보다 훨씬 잘한다는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8세 아동에게는 400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10세 아동에겐 200시간만 해도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죠.”
그는 1만1680시간의 법칙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하루 8시간을 꼬박 영어에 몰두하면 4년 안에 성과를 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하루에 투자하는 시간이 4시간이면 8년, 2시간이면 16년, 1시간이면 32년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은 늘어난다고 했다.
자유롭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이 교수는 학교 단위의 개별 영어 시험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대입을 목표로 과도하게 벌어지는 영어 교육의 무한경쟁을 줄이고 학교 현장의 영어 교육이 왜곡되는 현상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에서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도달 가능한 일정 수준만을 요구하고, 이 기준을 통과한 학생이면 별도의 영어 시험 없이 대학 입학 조건을 충족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대학이 전공별로 필요에 따라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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