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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외국인 학생 꿈 키우는 '연필 장학금'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9. 3. 14. 08:30

 

국내 외국인 학생 꿈 키우는 '연필 장학금'

문구사 알파 임직원들 학생 1인 年100만원씩
"아르바이트 대신 공부에만 집중 기뻐"
"이들이 자국(自國) 돌아가면 한국에 큰 힘 될 것"

정지섭 기자 xanadu@chosun.com 
김어진 기자 hanmeu@chosun.com 
양희동 기자 eastsun@chosun.com

 

지난달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중국계 말레이시아 유학생 친이창(秦乙强·26)씨의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2002년 한국에 온 친씨는 서울대 언어교육원을 1년 6개월 동안 다니고 성균관대 외국인 전형에 합격했다. 그는 대학 등록금과 한달 생활비 80만원을 벌기 위해 쉴새 없이 영어·중국어 과외와 시급 2500원짜리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씨가 '알바 전선'에서 물러나 한숨 돌리고 공부에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은 2007년 한 문구업체가 주는 일명 '연필 장학금'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매 학기 50만원씩 받았어요. 등록금이 전부 해결된 건 아니지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나 줄이고 하루 한 시간씩 더 공부할 여유가 생겼어요. 고국에 돌아가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요. 20년 뒤 나도 장학재단을 세워서 한국과 말레이시아 학생을 반반씩 돕고 싶어요."

'연필 장학금'은 전국에 500개 체인점을 둔 국내 최대 문구유통업체 알파㈜가 주는 장학금이다. 창업자인 이동재(李東載·61) 회장이 아이디어를 내서, 2003년부터 형편이 어렵거나 학업성적이 탁월한 고등학생과 대학생 100명에게 매 학기 50만원씩, 한 해 1억원을 지원해왔다. 공책과 필기구도 한 학기 동안 다 쓰고도 남을 만큼 선물해준다.
▲ 서울 남대문 알파㈜ 본점에서 이동재(왼쪽) 회장이 외국인 '연필 장학생' 친이창(가운데)씨, 올가 김(오른쪽)씨에게 연필장학회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처음에는 국내 학생들만 혜택을 줬다. 인천 출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연필 장학금을 받은 최누리(여·19)씨는 올해 홍익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최씨는 "빠듯한 살림을 꾸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지만, 공부할 시간이 줄어 성적이 떨어질까 봐 엄두가 안 났다"며 "장학금을 탄 뒤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알파는 2007년부터 외국인 유학생들까지 대상을 넓히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전체 장학생 100명 중 10명이 외국인 유학생이 됐다. 이 회장은 "못 배운 한을 베풀어서 풀려고 장학사업을 시작했다"며 "일선 매장 직원들에게 '힘든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이라는 보고를 받고 '아차' 싶었다"고 했다.

"1970~80년대엔 우리 학생들도 미국과 유럽에서 장학금 받고, 주경야독하면서 어렵게 공부했을 겁니다. 외국인 유학생과 우리 학생들의 얼굴이 겹쳐 보이면서 '외국인도 장학금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알파㈜는 대학교와 각국 대사관의 추천과 면접을 거쳐 외국인 장학생을 뽑았다. 이 회장은 "한국어 실력, 한국학 전공 여부보다 '자신의 꿈을 얼마나 진지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를 봤다"고 했다.

2006년 중앙대 영어영문학과에 특례 편입한 한국계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올가 김(여·27)씨는 어머니와 단둘이 흑석동 자취방에 살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전화 영어 강사 등 손에 닿는 아르바이트는 전부 해왔다. 집에 돌아오면 곧장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김씨도 2007년 연필 장학생이 된 뒤 한숨 돌렸다. 김씨는 "물가가 계속 올라서 교통비랑 생활비 부담이 너무 컸다"며 "연필 장학금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버텨왔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전북 남원의 가난한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만 마치고 상경해, 조그만 회사의 경리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주경야독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는 스물세 살 되던 1971년 남대문시장 어귀에 18㎡(5.5평)짜리 '알파문구'를 차렸다. 그는 "경리부에서 일하면서 문구는 경기를 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며 "새벽 5시부터 가게 문을 열고 독하게 돈을 벌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학생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 회사는 없었을 것"이라며 "'연필'은 우리 회사를 키워준 상품인 동시에 자신을 깎아서 남에게 이롭게 쓰이는 물건이라 장학금 이름도 '연필 장학금'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작년 말 현재 국내 대학에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은 6만3592명이다. 이에 따라 이들을 위한 장학금이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다.

포스코 청암재단은 2005년부터 서울대 등 5개 대학 국제대학원과 포항공대, 광주과학기술원에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 70명에게 장학금을 준다. 롯데장학재단도 2002년부터 서울대 등 8개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아시아 학생 20여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이동재 회장은 "나는 작은 회사를 하는 사람이라 큰 기업만큼 혜택을 많이 주진 못하지만, 형편 닿는 대로 매년 외국인 장학생 숫자를 늘려나갈 것"이라며 "다들 자기 나라에 돌아가면 국가의 기둥이 될 인재들이라 길게 보면 우리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는 보람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