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재미교포 2세 마이클 강 범죄 스릴러 ‘웨스트 32번가’
교포 1.5세·2세 사이의 갈등 통해
자신의 뿌리를 묻는 영화 주요 배우 모두가 교포 2세
어수웅 기자 jan10@chosun.com
입력시간 : 2007.11.09 00:01 / 수정시간 : 2007.11.09 03:20
재미교포 2세 마이클 강 감독의 ‘웨스트 32번가’(15일 개봉)를 큰 기대 없이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의자에서 등을 떼서 앞을 당겨 앉고 말았다.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묻는 교포 감독 특유의 작가적 질문을 넘어, 이 영화가 일반 대중까지도 유혹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학술적 용어로 ‘디아스포라(Diaspora) 영화’라고 부르든 ‘교포 영화’로 한정하든, 이 부류의 관객은 필연적으로 소수이기 십상이다. 고민의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태생적 한계를 범죄 스릴러라는 대중적 장르로 돌파한다는 게 마이클 강 감독의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90분의 러닝타임 내내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 ▲ 뉴욕에서 한국계 14세 소년이 살인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과연 진범일까.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뉴욕 웨스트 32번가의 한인 룸살롱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린다. 죽은 사람은 룸살롱 지배인 전진호(정준호). 현장에서 붙잡힌 범인은 겨우 14세의 한국계 소년이다. 소년의 누나 라일라(그레이스 박)는 동생의 결백을 주장하고, 미국 주류사회에서 성공하려는 재미교포 2세 변호사 존 킴(존 조)은 이 사건을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는다. 소년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한인 사회 뒷골목을 파고 들던 존 킴이 만난 인물은 교포 1.5세의 양아치 마이크 전(김준성). 전진호의 뒤를 이어 지배인 자리를 꿰차고 한인 조직폭력배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야망의 사내다. 이제 교포 1.5세와 교포 2세의 야심이 충돌하면서, 사건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질주한다.
이렇듯 범죄 스릴러라는 전경(前景)을 한참 즐기며 감상하는 동안, 쉽지 않은 질문 하나가 스크린 뒤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바로 이방인의 정체성 찾기라는 후경(後景)이다. 기본 연기력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겠지만, 배우들의 비범한 설득력은 그들 자신의 이력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우정 출연한 정준호를 제외하면, 감독부터 주요 배우 전원이 교포 2세다. 버클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존 조(‘아메리칸 파이2’ ‘헤롤드와 쿠마’)는 할리우드에서도 끊임없이 러브 콜을 받을 만큼 입지를 다졌고, 캐나다에서 성장한 그레이스 박(‘배틀 스타 갈락티카’)과 이제는 한국 관객에게 더 익숙한 김준성(‘사랑니’ ‘어깨너머의 연인’)도 홍콩에서 태어나 20년간 그곳에서 생활한 배우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배우들이 자신의 국적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풍경은, 이들의 연기가 실제인지 영화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사실적이다.
- ▲ 가운데의 두 사내, 교포 2세 존 킴(존 조·왼쪽)과 1.5세 마이크 전(김준성)의 갈등이 이 영화의 축이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자식의 은인에게 직접 지은 밥을 해 먹이려는 교포 1세 엄마와 익숙하지 않은 한국식 접대에 당황하는 교포 2세 변호사의 코믹한 식사 장면, 그리고 어찌됐든 한인사회에서 인정 받으려는 1.5세와 기를 쓰고 미국 주류사회로 편입되려는 2세 엘리트의 갈등은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같은 교포사회 내에서도 ‘미국적’이라는 꼬리표를 굴레로 받아들이는 세대와 간절히 소망하는 세대로 갈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이클 강 감독은 세련된 방식으로 묘사한다.
뉴욕 웨스트 32번가는 일종의 문화적 점이지대다. 마치 서울의 한 유흥가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코리아타운이지만, 결코 한국도 미국도 될 수 없는 공간. ‘웨스트 32번가’가 뉴욕의 트라이베카 영화제와 한국의 부산영화제에서 동시에 초청받았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시사적이다. 마이클 강의 새로운 실험이 양국 모두의 대중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한국영화’와 ‘미국영화’의 정의를 한 뼘 더 풍성하게 만든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디아스포라(Diaspora)
고대 그리스어로 넘어(Dia)와 씨뿌리다(Speiro)의 합성어. 원래는 외세에 의한 강제 집단이주를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외국에 살면서도 집단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용어가 됐다.
- ▲ 위쪽부터 마이클 강, 리 이삭 정, 데니스 리.
최근의 2세 감독들은 이런 뿌리 찾기 강박에서 벗어나 인류사의 보편적 질문을 던지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올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리 이삭 정 감독의 ‘문유랑가보’는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의 아픔과 치유를 그렸고, 줄리아 로버츠를 캐스팅해 화제를 모은 데니스 리 감독의 ‘정원의 반딧불이’는 예기치 못한 비극을 맞이한 가족의 헌신과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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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라는 뿌리에 대한 교포 1.5세와 2세의 갈등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라는흥미로운 장르로 대중관객까지 유혹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어수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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