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유지상.권혁재]
"진주 음식에선 우직한 맛이 나요. 체통을 따지는 진주 사람들의 무게감이 담겼달까요? 그런데도 친근하게 와닿는 건 은은한 유혹의 맛이 깔려 있기 때문이겠지요."
35년을 '서울깍쟁이'로 지내다 10년 전 남편을 따라 진주로 내려온 염혜영씨. 진주 음식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곤 곧바로 목소리 톤을 높여 열변을 토한다.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과 냉면이 있어요. 그런데 타지 사람들은 전주비빔밥은 알아도 진주비빔밥은 잘 모르죠. 북녘 땅의 평양냉면.함흥냉면은 알면서 남한 땅의 진주냉면을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잖아요."
놀랍게도 10년 사이 진주음식 전도사가 다 된 모양이다. 모양이 아니라 실제 진주의 매력에 푹 빠져 전통춤인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12호)까지 이수하고, 지난해부터는 진주의 문화유산 해설사로 일하고 있단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주비빔밥부터 슬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진주비빔밥은 전주비빔밥과 더불어 한국 비빔밥의 양대 산맥. 전주비빔밥이나 진주비빔밥이나 사골 육수로 밥을 짓고 나물과 육회를 올려 고추장에 비비는 것은 같으나 비빔 재료에 차이가 있다. 전주비빔밥에는 콩나물과 황포묵이 빠지지 않는 반면 진주비빔밥에는 푹 삶은 숙주나물과 바지락을 곱게 다져 끓인 '포탕'이란 게 올라간다. 고추장도 다른데 전주는 찹쌀장을 쓰지만 진주는 메주콩이 많이 들어간 밀가루장을 쓴다. 그래서 전주비빕밥은 보슬보슬하고 달달한 맛이 있고, 진주비빔밥은 촉촉하면서 구수한 향이 강하다고 한다. 비빔밥과 함께 내는 국물도 전주는 콩나물국이고, 진주는 선짓국이다.
진주 냉면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염씨는 크게 한숨을 쉰다.
"아쉽게도 진주 냉면의 맥이 끊어지고 있어요. 몇 년 전만 해도 진주시내에 제대로 맛을 내는 곳이 있었는데 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문을 닫았어요. 다른 업소에서 재현하려 애를 쓰고 있지만 예전의 그 맛과 아직 거리가 있네요."
진주냉면은 메밀국수를 시원한 육수로 말아낸 평양냉면과 비슷하다고 한다. 면은 인근 지리산 산간 지방에서 재배한 메밀로 뽑고, 육수는 육고기 대신 멸치.바지락.홍합.북어 등 해산물로 만든다. 평양냉면은 동치미 무를 얇게 썰어 꾸미로 쓰는 반면, 진주냉면은 김치를 얇게 썰어 올리고 배.오이.쇠고기육전.지단으로 오색의 꾸미를 올린다. 이렇게 만들어 권번을 출입하던 지체 높은 분들이 야참음식으로 즐겨 먹던 것이 진주 냉면이라는 것이다.
"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는 교방음식도 있습니다. 진주는 예로부터 '북 평양, 남 진주'라고 할 정도로 기생들과 함께 하는 음식이 발달했거든요. 일제 침략 뒤 교방문화가 폐쇄되면서 다소 위축된 점이 있지만 그 화려한 상차림이 일부 한정식집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이 밖에 진주교에서 진주성으로 가는 남강변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장어구이, 술 마신 다음날 속풀이에 좋은 시래기 해장국과 콩나물 해장국도 진주의 정서가 담긴 음식이다. 마지막으로 가게는 허름해도 손님들이 줄을 잇는 깐돌이네 물국수랑 수복빵집의 찐빵은 먹지 않고 지나치면 반드시 후회할 신흥 진주 명물이라고 했다.
(진주) 글=유지상 기자 yjsa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서울 출신 진주댁 염혜영씨가 추천하는 맛집
■ 비빔밥만 3대 천황식당 =진주 시민들에게 전통 비빔밥집을 물으면 대부분 중앙시장의 이곳을 꼽는다. 3대에 걸쳐 80여 년 동안 한 자리에서 비빔밥만 비벼왔기 때문. 마른 홍합.문어.바지락.쇠고기.표고버섯을 푹 우려내 만든 포탕을 비빔밥에 한 숟가락씩 올려 비비기가 쉽다. 숙주.고사리.배춧속.애호박.무나물 등 나물류를 푹 삶아 부드럽게 목을 넘어간다. 비비기 전 육회를 비빔장에 살짝 찍어 맛보는 것도 재미나다. 곁들여지는 선짓국에는 선지를 깍두기처럼 잘게 썰어 넣은 게 특이하다. 값은 일인분에 5000원. 055-741-2646.
■ 교방 상차림이 궁금하다면 아리랑 =진주 선상기(選上妓.어릴 때부터 궁중으로 뽑혀 올라가 연회에 참여하던 기생)에 의해 전해진 화려한 교방 한정식을 느낄 수 있는 곳. 곱게 차려입은 종업원의 안내로 방에 들어서면 하얀 상 위에 빼곡히 차려진 상차림에 눈이 두 배로 커진다. 구절판과 신선로를 중심으로 화려한 색상의 음식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하나하나 이름 대기도 쉽지 않다. 방앗잎을 넣고 된장 풀어서 지진 장떡에서 진주를 맛보고, 찹쌀로 빚은 맑은 청주를 마시며 진주에 취한다. 일인당 5만원상(4인 이상), 점심엔 1만2000원짜리 알뜰 교방상차림도 있다. 055-748-4556.
■ 부활한 진주냉면 유정장어 =남강변 장어구이집 가운데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장어(일인분에 1만3000원)를 연탄불에 소금초벌구이를 해 냉동 보관했다가 일주일가량 지난 뒤 소금구이와 양념구이로 다시 구워 식탁에 올린다. 그래선지 약간 마른 맛이 난다. 이 집에서 전통 진주냉면을 재현해 판매 중인데 나이 든 분들이 60점 수준이라고 평한다. 가다랑어.건새우.멸치.조개로 장국을 뽑았다고 하고 메밀면은 일본 소바를 닮았다. 진주냉면은 5000원. 055-746-9235.
■ '정구지' 듬뿍 올린 물국수 원깐돌이 =점심시간만 장사를 하는데 일찍 가지 않으면 다 팔고 문을 닫아버려 헛걸음하기 십상이다. 비빔국수도 있지만 시원한 해물장국의 물국수(3000원)가 인기 '짱'이다. 진주 국수 특유의 웃기인 정구지(부추)와 애호박무침, 숙주나물 등이 올라가 있다. 해장술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안주거리(1만5000원)도 있는데 겨울엔 가오리무침, 다른 계절엔 가오리찜과 해물숙회를 푸짐하게 담아준다. 빨간 날은 모두 휴무. 055-742-3937.
■ 속 시원한 시래기 해장국 제일식당 =중앙시장 먹자골목 입구의 허름한 식당이지만 휴일이면 외지로 향하는 등산객과 여행객으로 새벽부터 줄을 잇는다. 이 집의 해장국은 멸치 장국에 구수한 된장을 풀고 시래기를 넉넉히 넣어 끓인 것. 뚝배기에 밥을 말아 숟가락을 푹 담가 내준다. 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를 아주 잘게 썰어 젓가락이 필요 없기 때문. 내 식탁 네 식탁 없이 손님끼리 식탁을 공유하고 속전속결로 먹고 나갈 마음 자세가 필수다. 3000원. 055-741-5591.
■ 달콤한 단팥 찐빵의 추억 수복빵집 =외지로 나간 진주 사람들이 고향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찐빵을 만드는 곳. 한입 크기의 찐빵에 단팥을 부어 내놓는데 빵 속의 팥소와 함께 달콤함에 푹 빠진다. 찐빵과 단팥죽을 같이 먹는 것이라 요깃거리로도 충분하다. 주인 부부의 무뚝뚝함이 거슬리긴 하지만 찐빵을 만드는 정성과 맛을 고려하면 6개에 2000원을 내기엔 손이 부끄럽다. 055-74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