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육의 목표

토익 900점 '영어 우등생'을 위한 경고

아이미래디자인연구소 2008. 5. 18. 11:07

 토익 900점 '영어 우등생'을 위한 경고

[영국인 기자의 콩글리시 비판]

토익(TOEIC)의 망령에서 벗어나라
햄버거 주문도 못해 쩔쩔매는 고득점자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06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팀 알퍼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번역 = 최혜원 기자 happyend@chosun.com
입력 : 2008.05.16 20:51 / 수정 : 2008.05.16 20:5 

 

여기 젊은 한국인 여성이 한 명 있다. 편의상 그의 이름을 지영씨라고 하자.

지영씨는 출장차 영국 런던에 와 있는 참이다. 식사도 거른 채 장장 4시간에 걸친 비즈니스 미팅을 겨우 끝낸 그는 배가 너무 고파 요기라도 할 요량으로 근처 맥도날드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카운터 앞에 서고 보니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것이었다. 지영씨의 토익(TOEIC·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 점수는 900점대로 나쁘지 않은 편. 그러나 그는 “치킨버거와 프렌치프라이 하나 주세요”란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넬 수 없었다.

외국인 점원 앞에서 쩔쩔매는 지영씨의 모습은 한국인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풍경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우수한 토익 점수는 영어권 국가에서 원어민과 진행하는 실제 의사소통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토익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익이 영어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인 것처럼 통용되는 이유는 뭘까?

토익 자체에 대해
아무리 공부해도 점수 잘 나오는 테크닉만 늘 뿐
필기시험으로 말하기 실력 평가?… 어불성설


교육열 높기로 유명한 동아시아인의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험’으로 대변되는 점수 위주 평가다. 이는 영어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영어회화 실력을 늘리고자 하는 한국인은 대거 토익 시장으로 몰렸고 그 결과 무수한 토익 만점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그들 중 영어 문장을 능수능란하게 조합해 원어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도 토익이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1998년 서울대가 토익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영어시험 ‘텝스(TEPS·Test of English Proficiency developed by Seoul National University)’를 내놓았다. 그러나 명칭과 평가 유형이 달라졌을 뿐 점수에 집착하는 수험생을 낳는 현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토익이나 텝스를 아무리 공부해도 영어 말하기(speaking)에 대한 실용적 기술은 전혀 익힐 수 없다. 그저 출제 빈도가 높은 문제 유형을 잘 외워 점수 잘 받는 테크닉이 늘어날 뿐이다. 토익 개발기관인 ETS도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말하기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별도 시험 ‘TOEIC S&W(Speaking & Writing Test)’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06년 1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토익이나 텝스 인구에 비해 아직은 응시자 수가 많지 않고 효과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한국인 누구나 ‘토익병(病)’의 부작용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이 떠올리는 대안이란 고작 ‘또 다른 시험’인 경우가 태반이다. 불행히도 필기시험 형태로 누군가의 언어 지식을 판단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은 없다. 언어 학습은 첫째도, 둘째도 말하기다. 영어든 한국어든 제3의 언어든 간에 그 언어를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해보는 것이다. 성가시고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도리가 없다.

토익 맹신주의에 대해
영어 점수 높으면 무조건 우수한 인재?
시험으로 실력 평가하는 습관부터 버려라

토익이 지닌 한계는 문제의 본질 면에서 보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골치 아픈 것은 시험제도를 바라보는 한국인, 특히 한국 기업의 생각이다. 한국에서 토익이나 텝스 점수 없이 구직 활동을 하는 것은 정말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영어 공인시험 점수를 요구하는 기업 중 줄잡아 절반 가량은 영어가 전혀 필요 없는 근무 환경을 갖고 있다. 단지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겠다’는 명분만으로 실제로 필요하지도 않은 영어 실력을 채용 자격으로 정해놓고, 시험 점수를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런 폐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자는 말하기 시험(oral exams)을 본격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 학습자의 목표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영어 구사력 향상이라면 말하기 실력을 직접 측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시험이 말하기 부문에 집중되면 자연히 교과서와 교실 위주의 죽은 수업은 사라지고, 문법과 단어를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습관도 교정되며, 그러다 보면 토익 위주 공부 패턴도 금세 잊혀진다는 논리다.

그러나 영어 말하기 시험은 끔찍한 생각이다. 그것이 실제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수반될 엄청난 문제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통계에 따르면 매년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토익 시험에 응시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만약 그들 모두가 토익 대신 말하기 시험을 치른다면 최소한 200만명의 수험생을 관리, 평가할 수 있는 숙련된 감독자가 필요할 것이다. 국내에서 조달할 수 없다면 해외에서 전문가를 초빙해와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드는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새로운 시험을 치르는 데 따르는 혼란과 수고로움은 교육 제도에 반갑잖은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잖아도 공부에 대한 부담으로 고통 받는 학생들이 이로 인해 또 하나의 짐을 떠안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기업들에 대해
입사지원서의 토익 성적란 과감히 없애라
에세이 평가나 심층 인터뷰가 훨씬 효과적

영어 공인시험의 폐해와 관련, 한국 기업에 충고하고 싶다. 우선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전 반드시 심사숙고하라. 당신 회사에 정말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원이 필요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당장 신입사원 채용 공고를 낼 때 제출 서류에서 토익이나 텝스 성적표를 지워버려라. 별 소용 없는 시험 점수를 묻는 관행도 과감히 없애라.

신입사원의 영어 쓰기 실력을 점검해보고 싶다면 전형 과정에서 회사에 관한 간단한 에세이 한 편을 쓰게 하자. 응시자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기업의 모습, 이를테면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나 각 부서의 업무 등을 묘사하게 하는 것도 좋다. 평가도 어렵지 않다. 어느 회사든 지원자들이 쓴 에세이를 평가할 만큼의 영어 실력을 갖춘 인재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에게 심사를 맡겨 옥석을 가리면 된다.

영어 말하기 능력이 탁월한 직원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라면 면접단계에 영어 심층 인터뷰 과정을 포함시켜야 한다. 단 인터뷰에 등장하는 질문은 기상천외하고 예측불가능한 성격의 것이어야 한다. “당신 자신을 소개해보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보라” 따위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신입사원이 얼마든지 예상해 답변을 준비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좋아하는 과일, 탁구(table tennis)와 테니스(lawn tennis)의 차이점, 혹은 “지금 100만달러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과 같은 질문을 던진 후 대화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관찰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한국의 시험’에 대해
토익 영어는 시험 끝나면 깡그리 잊어버려
‘have+p·p’ 배울 시간에 ‘빅맥’ 주문법 배워라


한국의 교육은 ‘시험’이란 개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 수학, 물리학, 영어, 심지어 줄넘기에 이르기까지 평가 방식은 오로지 단 하나, 시험이다. 그러나 시험 위주 평가방식엔 치명적 한계가 있다. 시험에 익숙해진 이들은 시험 기간이 임박하면 점수를 잘 받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지식을 머릿속에 꽉꽉 채워 넣지만 막상 시험이 끝난 후엔 배운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영어를 배우는 데 ‘이거다!’ 할 방법? 없다. 한국인의 영어학습 욕구를 한달음에 떨쳐버릴 수 있는 묘안? 물론 없다.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원어민과 의사소통하는 것은 분명 흥미롭고 짜릿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이 토익과 텝스 공부로 익힌 영어는 언어 학습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어 그 효용이 크게 떨어진다. 영어시험 성적이 꽤 괜찮은 한국인들이 영어 사용 환경에서 소외된 상태로 지내다 막상 외국인과 마주치면 얼굴 빨개진 채 입도 벙긋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언어 실력을 시험으로 측정한다’는 개념은 철저히 언어가 사용되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비롯됐다. 누군가의 영어 실력을 정말 ‘시험’하고 싶다면 영어로 말하고 쓰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 피시험자를 놓아두고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찰하는 게 최선이다.

토익 점수에 대한 집착은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토익 공부는 학습자에게 ‘have+p.p(과거분사)’ 구조가 어떤 경우에 무슨 의미로 쓰이는지에 대해선 술술 읊게 할지 몰라도 영어로 빅맥(Big Mac) 주문하는 방법 같은 건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토익 고득점자의 후회


“점수 높아봐야 업무에 도움 안돼
 차라리 실용영어 공부했더라면”


한국에 있는 미국계 외식업체에서 매니저로 일했던 연봉조(여·35)씨는 입사 초기 토익 공부에 매달렸다 톡톡히 낭패를 겪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외국계 기업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원하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토익 공부에 매진했고 꽤 높은 점수(850점)를 얻을 수 있었어요. 당시 전 제가 영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됐다고 믿었어요. 토익 점수가 그 증거라고 생각했죠. 분명히 어떤 면에서 토익 공부는 제게 도움이 됐습니다. 영어 작동 기제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그 지식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즐기진 못했어요.”

그는 “토익 준비에 시간을 쏟아 부을 땐 신경이 온통 교재에 쏠려 있었고 단어 외우기에 급급했다”면서도 “정작 영어로 누군가와 말해볼 기회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영어 말하기 실력이 무척 중요합니다. 늘 해외 고객이나 업무 파트너와 전화로 혹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죠. 막상 일을 해보니 토익은 그런 업무를 대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더군요. 지금은 무척 후회됩니다. ‘토익 준비하던 시간에 좀 더 실용적인 영어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요즘 그는 회사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아 신입사원 채용 쪽에 관여하고 있다. 면접 때 그가 제일 신경 쓰는 부분 역시 지원자의 영어 말하기 실력.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토익 성적표를 내밉니다. 그렇지만 인터뷰 룸에 들어가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부분이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제가 입사할 때와 조금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은 거죠.”


효과적 영어를 위한 제안
문장의 악센트는 주어와 서술어

“Why did you do THAT?”이 아니라 “Why did you DO that?”

한국인들은 영어회화를 할 때 알파벳 하나하나의 강세(stress)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l’과 ‘r’의 발음 차이를 헷갈려 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정작 문장에서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영어 문장의 강세는 한국어와 그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영어로 된 문장을 말하고자 할 땐 어느 단어를 강조해야 하는지 결정한 후 그 단어에 확실한 강세를 줘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왜 그거 했어?”란 한국어 문장에서 강세는 ‘그거’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강세까지 똑같이 적용해 “Why did you do THAT?”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색한 문장이 된다. 영어 체계에선 서술어나 주어에 강세가 주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거’와 같은) 목적어가 강조되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을 보다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면 “Why did you DO that?”과 같이 발음해야 한다.


목적어 없는 서술어는 없다
“그거 해!”는 “Do!”가 아니라 “Do it!”

영어로 의사소통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른 한국어를 영어로 직역(direct translation)하는 습관이다. ‘목적어 없는 서술어’가 남발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어 체계에선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동사가 흔하지만 영어에선 그렇지 않다.

원어민과 의사소통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게”란 말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무심코 한국어 방식으로 “I will do”라고 말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나 상대방은 ‘do’ 다음에 놓일 목적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며 당신의 말이 완전하게 끝나길 기다릴 것이다. 이 경우, 말할 것도 없이 “I will do it”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거 해!”란 문장을 옮길 때도 마찬가지다. “Do!”라고 이야기하기 쉽지만 이는 굉장히 이상한 번역이다. 이때도 목적어를 분명히 밝혀 “Do it!”이라고 말해야 한다.